권력의 화신, 신라출신 아이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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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新삼국사 산책

권력의 화신, 신라출신 아이부인

남편 근구수왕과 아들 침류왕·진사왕을 주무른 아이부인

정재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0-02-23 16:40:57

<삼국사기>가 기록한 백제 왕비는 보과(寶菓), 아이(阿尒), 팔수(八須), 3명이다.그런데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백제 내부출신이 아닌 외부출신이다. 또한 왕자를 생산하며 그 왕자는 남편 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다. 이런 까닭으로 이들 3명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왕실권력의 중심에 선다. 보과는 대방국 왕녀 출신이며, 팔수는 왜(야마토) 왕실 출신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어디 출신일까.

신라 귀족출신 아이부인

아이(阿尒)부인은<삼국사기>에 침류왕(15대)의 어머니로 기록된 여성이다. <신라사초>(남당필사본)에 그녀의 출신이 나온다. ‘부여태자 근수(근구수)가 입조해 백발의 딸 아이를 처로 삼았다. 포사(포석정)에서 혼례를 행하였다.[夫餘太子謹須入朝以白發女阿尒妻之行吉鮑祠]’ 아이부인은 신라귀족 백발(白發)의 딸이다.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 태자가 신라로 직접 건너가 포석정에서 혼례를 치른다. 이 해는 349년으로 근초고왕 재위 4년이다. 이 시기는 <삼국사기>가 근초고왕 전체 재위기간 30년(346년~375년) 중 초기 20년간을 기록의 부재(不在)로 처리한 부분이다. 당시는 신흥강자 부여백제(부여기마족)가 한반도 내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시기이다. 근구수와 아이부인의 혼인은 부여백제의 압박을 견제하기 위한 근초고왕의 고육책으로 이해된다. 일종의 혼인동맹 성격이 강하다.

아이부인은 권력의 화신

아이부인은 근구수를 통해 두 명의 아들을 낳는다. 침류왕과 진사왕이다. 이후 근초고왕이 사망하고 남편 근구수가 즉위하면서 왕비가 된다. 근구수왕(14대)은 375년~384년까지 10년간을 재위한다. 그런데 <신라사초>에 아이부인의 위상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들이 나온다.

379년(근구수5) 백제에 파견된 신라사신이 본 백제의 정치상황이다. ‘이때 발강의 누이 아이가 근수(근구수왕)의 처가 되었는데 그 나라를 오로지했다.[時發康女兄阿尒爲謹須妻專其國]’ 아이부인이 정사(政事)를 오로지한다는 것은 왕비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남편 근구수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특히 4년 후인 383년(근구수9) 기록은 더욱 놀랍다. ‘3월 부여유민 30호가 또 항복해 왔다. 부여와 왜가 상통하니 해마다 그 백성을 받아들여 도성과 시골에 분산 배치했다. 왜신 웅언은 잘 생기고 말솜씨가 좋아 아이와 서로 정을 통하니 그 말을 많이 따랐다. 그런 까닭으로 국인이 이반하여 혹은 우리에게 오고 또는 고구려에 귀속했다.[三月夫余流民三十戶又來降夫余與倭相通年年受其民散置都鄙倭臣熊彦美而善辯與阿尒相通多聽其言故國人異反或歸于我亦歸于麗]’

아이부인은 왜신(倭臣) 웅언(熊彦)을 정부(情夫)로 둔다. 또한 웅언의 말을 좇아 정사를 결정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에 반발한 국인(國人-지배층)이 신라와 고구려로 망명한다. 한 마디로 아이부인은 남편 근구수왕을 제쳐두고 정부 웅언과 함께 권력을 독식한다.

웅언은 누구일까. 천웅장언(千熊長彦)이다. 369년 부여백제 여구(餘句)왕이 목라근자를 시켜 삼한정벌을 단행한 후 벽지산(모악산)과 고사산(두승산)에서 근초고왕 부자와 더불어 항복맹세를 받은 왜신이다. 천웅장언은 항복맹세 3년 후인 372년 부여백제 여구왕이 왜왕 지(旨)를 후왕으로 책봉하는 칠지도(책봉문서)를 직접 수령해 왜로 가지고 간다. 그런 천웅장언이 10년이 지난 시점에 한성백제로 들어와 아이부인의 정부가 된다.

근구수왕은 이듬해인 384년(근구수10) 사망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근구수왕의 죽음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긴다. ‘2월, 해에 세 겹의 햇무리가 생기고 궁궐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4월 왕이 죽었다.[春二月日有暈三重宮中大樹自拔夏四月王薨]’ 세 겹의 햇무리는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며 궁궐의 큰 나무가 뽑힌 것은 근구수왕의 실각을 묘사한다. 근구수왕은 쿠데타로 인해 쫓겨나며 유폐(幽閉)된 후 사망한다. 세 겹의 햇무리는 바로 아이부인과 천웅장언이며 또 한 사람은 당시 진씨 귀족의 수장인 내신좌평 진고도(眞高道)로 추정된다.

이후의 아이부인 행적이 <신라사초>에 계속해서 나온다. ‘부여의 근수가 죽고 침류가 섰다. 그 어머니 아이가 집정하였다.[夫余謹須殂枕流立其母阿尒執政]’ 아이부인은 남편 근구수왕을 실각시켜 죽게 만들고 아들 침류왕을 옹립하고 섭정한다. 아이부인의 권력은 침류왕(15대) 때에도 계속 유지한다. 그러나 침류왕은 재위 2년만에 동생 진사왕에 의해 실각한다.

진사왕(16대)은 385년~392년까지 8년간을 재위한다. 진사왕의 뒤를 이은 왕은 침류왕의 아들 아신왕이다. <신라사초>는 ‘진사가 구원에서 죽으니 이에 아이가 아신을 왕으로 삼았다.[辰斯卒于狗原阿尒乃立阿莘爲君]’고 기록한다. 아이부인은 손자 아신왕(17대)의 옹립에도 적극 관여한다. 다만 이후 행적은 더 이상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아이부인은 349년 근초고왕 며느리로 처음 백제 왕실과 인연을 맺은 이후 손자 아신왕을 옹립한 392년까지 무려 43년간을 왕실권력의 중심에 서서 정계를 좌지우지한다. 왜신 천웅장언을 정부로 둔 까닭에 남편 근구수왕을 매몰차게 버리며 아들 침류왕과 진사왕 치세는 물론이고 손자 아신왕 때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놓지 않는다.

아이부인은 권력의 화신이다. <삼국사기>가 기록하지 않은 신라출신 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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