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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어긴 거래소와 신라젠 사태

한원석기자(wshan@skyedialy.com)

기사입력 2020-07-30 00:02:57

▲ 한원석 금융부 차장
‘Pacta sunt servanda’라는 라틴어 어구가 있다.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뜻의 로마법 법언이다. 로마법의 ‘신의성실(bona fide)의 원칙’에서 유래한 것으로 계약을 신성시하는 법의 근간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른 말로 ‘계약충실의 원칙’이라고도 부른다. 우리 대법원은 ‘계약준수원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자어로 봐도 ‘약속(約束)’이란 말은 ‘맺을 약(約)’과 ‘묶을 속(束)’으로 이뤄져 있다. ‘언약하여 정함’이나 ‘서로 언약한 내용’(네이버사전), ‘장래의 일을 상대방과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카카오사전) 이라는 의미다. 서로 묶는 구속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는 오늘날 전 세계 민법과 국제법의 대원칙 중 하나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은 제26조에서 ‘약속은 준수하여야 한다’는 문구 아래 ‘유효한 모든 조약은 그 당사국을 구속하며 또한 당사국에 의하여 성실하게 이행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민법 제2조에서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는 규정과 제390조의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에는 채권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규정이 각각 신의성실의 원칙과 계약충실의 원칙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거래소(거래소)가 신라젠에 대해 거래정지 조치를 한데 이어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으로 결정하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거래소의 이러한 조치는 신라젠 경영진이 불법행위로 기소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검찰은 문은상 대표를 비롯한 신라젠 경영진이 총 1918억원에 달하는 부당이득을 얻고,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배임) 등의 혐의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개인투자자들은 거래소가 투자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상장 이전의 일을 문제 삼아 거래중지에 이어 상장폐지를 검토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강하게 성토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이 기소한 사안들은 모두 신라젠 상장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상장 이전에 발생한 범죄 행위를 개인투자자들이 사전에 감지하고 회피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나 방법은 전무한데 거래소가 무리하게 상장폐지를 시키려고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거래소가 신라젠의 상장 폐지 결정을 내릴 경우 피해는 고스란히 개미들이 입는다. 신라젠에 투자한 개인투자자들은 지난해말 기준 16만8778명에 달한다. 비율로는 99.98%다. 이들은 전체 신라젠 주식의 87.68%인 6229만7273주를 보유하고 있다. 이후 외국인과 기관투자자들이 상당수 빠져 나온 것을 감안하면 개인투자자 비중은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거래소가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지난 2016년 신라젠은 거래소의 기술특례 상장제도와 상장규정에 따라 코스닥에 입성했다. 이 과정에서 ‘AA’라는 전례없는 평가를 받았다. 신라젠이 개발한 항암치료제 ‘펙사벡’의 성공 가능성에 거래소가 무게를 실어준 셈이 된 것이다.
 
거래소 규정상 경영진의 횡령·배임 혐의 발생은 상장적격성 심사 사유에 해당한다. 하지만 문제의 경영진은 이미 해임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거래소가 투자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거래중지에 이은 상장폐지 여부를 심사하는 것은 상장을 승인해준 거래소 자신의 책임은 망각한 면피성 결정이다. 상장할 때는 문제없다고 승인해 놓고 이제 와서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투자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모양새다. 사실상 기존에 한 약속을 뒤집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앞서 본 신의성실의 원칙의 한 갈래로 ‘금반언(禁反言)의 원칙’이 있다. 이미 표명한 자기의 행위와 모순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으로, 결국 모순된 선행행위를 한 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부담하여야 한다는 의미다. 거래소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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