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영화를 좋아하신 어머니를 따라 함께 영화를 많이 보러다닌 덕분에 영화라는 세계를 알고 그 세계에 푹 빠지게 됐죠. 현실 세계는 한계가 있으니까 영화 속에서 대리만족을 찾았던 것 같아요. 영화는 자신의 삶 이외의 삶을 경험하게 해주는 매개이고 그것을 실제 일상의 삶보다 더 압축되고 강렬한 형태로 나오는 것이 매력이죠. 어두컴컴한 영화관이 풍기는 분위기도 저에게는 특별한 세계로 느껴졌어요. 무엇보다도 영화주인공에 감정을 몰입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 저 자신을 놓고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영화의 큰 매력으로 다가왔죠.”

 

영화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이라면 국내에서 개봉한 해외영화 중 백명선 판씨네마 대표가 수입배급한 영화를 최소 한 편 이상 봤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백 대표가 수입한 영화 중에는 100만 이상의 관객이 동원된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라라랜드’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 대표의 영화 안목과 사업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화제작 ‘미나리’도 국내에 소개했다.

 

“2003년 지금의 영화사 판씨네마를 설립했어요. 초창기에는 한국영화에 투자를 하는 일도 했어요.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외에 ‘광식이 동생 광태’ 등 수십편의 작품의 투자를 했죠. 그러다가 외국영화 수입배급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2003년에 ‘우리의 릴리’로 시작해 수십편의 외국영화를 수입했죠. 2008년에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수입과 배급을 맡았는데 이 영화로 관객 137만명을 동원했죠.”

 

“제가 수입배급한 대표작품인 ‘서칭 포 슈가맨’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빅 아이즈’ ‘노예12년’ ‘비긴 어게인’ ‘라라랜드’ 중에서 누구나 한 편 정도는 봤을 거예요. 또 ‘발레리나’ ‘핵소 고지’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 ‘러빙 빈센트’ ‘울프콜’ ‘라라걸’ ‘미스비헤이비어’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미나리’ ‘더 파더’ 등 140여편의 영화를 수입하고 배급했어요.”

  

사실 백 대표가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는 영화와 직접 관련이 없다. 미국에서 70년대 학번으로 불문학과 컴퓨터공학을 공부한 백 대표는 개발자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90년대 중반 직접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했다. 기술적으로 이미 전문가였던 그는 웹에 올릴 콘텐츠의 중요성을 인식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영화를 콘텐츠로 하기로 결심했어요. 당시에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매주 금요일 개봉영화 정보를 상세히 실은 신문을 빼놓지 않고 봤는데 한국에는 개봉 영화 관련 정보 제공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1997년 영화 정보 사이트인 ‘씨네서울’이었죠.”

   

백 대표가 추천한 영화인 ‘호우시절’은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로 잘 알려진 허진호 감독의 영화인데 판씨네마가 제작을 맡았다. 톱스타 정우성이 출연한 영화인데 흥행을 하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는 ‘라라 걸’ ‘미스비헤이비어’도 추천하고 싶은 영화라고 언급했다.

 

“지난해 4월에 개봉한 ‘라라걸’은 호주 여성 승마선수 실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었어요. 형제의 우애도 있고 영화도 잘 만들었던 작품이었어요. 재밌게 봤던 작품인데 코로나로 인해 많이 못 보신 거 같아서 아쉽긴 했어요. 3월에 개봉한 ‘울프 콜’은 코로나로 인해 많은 분이 보시지 못했지만 제가 본 작품 중에서도 정말 잘 만든 영화였죠. 5월에 개봉한 실화영화인 ‘미스비헤이비어’는 여성 운동 실화를 다룬 작품이었고 저희가 수입배급한 영화 ‘비긴 어게인’으로 유명한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와 ‘와일드 로즈’의 제시 버클리가 나와서 눈 여겨 봤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영화의 메시지도 괜찮았던 영화였죠.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라는 작품은 클래식을 소재로 한 영화였는데 나오는 클래식 음악들이 유명 음악가들의 곡들이어서 추천할 만해요.”

 

백 대표가 언급한 의외의 대박이 난 영화로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노예 12년’이었다. 브래드 피트가 제작을 맡았고 루피타 뇽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49만명을 기록하는 의외의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판씨네마 대표흥행작인 ‘비긴 어게인’은 최근에 재개봉도 하면서 누적 관객수 346만명을 모았다. 2014년 개봉 당시에는 적은 상영관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관객들의 입소문이 나면서 장기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비긴 어게인’은 2012년에 시나리오만 구매했어요. 처음엔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배우가 스칼렛 요한슨이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매력적이어서 기대를 했었는데 나중에 키이라 나이틀리로 바뀌게 됐다는 말을 들었죠. 결국 키이라 나이틀리도 정말 잘해줘서 다행이었죠.”

 

백 대표는 또 다른 흥행작인 ‘라라랜드’의 수입하게 된 이야기도 전했다. 영화의 시나리오만 보고 2014년 11월 아메리칸 필름마켓(AFM)에서 판권을 사들였다. 그 당시 백 대표가 라라랜드의 판권을 손에 넣기까지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라라랜드’의 시나리오에 반해 AFM에 직접 가서 판권을 살 예정이었지만 출발 일주일 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크게 골절돼 대수술을 받게 됐다.

 

“그때 다리를 다치게 되면서 AFM에 못 가게 됐어요. 저는 수술을 받고 나서 팔에 주렁주렁 링거를 단 채 병실에서 전화와 태블릿PC로 미국 현지와 판권 협상을 했죠. 낮과 밤이 뒤바뀐 상황에서도 다른 회사들과 경쟁에서 이겨 ‘라라랜드’를 극적으로 제 손에 넣게 됐어요. 저에겐 운명과도 같은 영화죠.”

 

흔히 뮤지컬 영화는 국내에서 흥행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어서 ‘라라랜드’를 수입할 때 주변에서 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백 대표는 ‘라라랜드’가 뮤지컬 영화라서 오히려 신선하다는 점에 모험을 걸었고 또 ‘위플래쉬’를 만든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연출력을 믿었기에 수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시 제가 봤던 시나리오는 햇병아리 같은 사회초년생들이 미국 LA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발을 내딛는 이야기였어요. 주인공들의 나이가 훨씬 어렸고, 엠마 왓슨과 마일즈 텔러가 캐스팅된 상태였죠. 그런데 판권을 사고 나서 몇 달 뒤 시나리오도 바뀌고, 주연 배우도 지금의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으로 바꾼다는 연락이 왔더라고요. 결과적으로는 잘 됐지만, 사실 그때는 주인공들이 나이가 왜 많아졌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도 됐어요.”

 

라라랜드는 지난해 3월 25일 재개봉해서 박스오피스 1위를 하면서 개봉 때 하지 못한 1위를 기록했다. 백 대표는 회사 직원들이 모두 기뻐했다면서 어려운 코로나 시대에 ‘라라랜드’가 효자 역할을 해냈다고 설명했다.

 

백 대표는 지난해 코로나로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라라랜드’ 흥행 이후에 3년 정도가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는 고백도 했다. 올해는 ‘미나리’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극장에서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차지한 화제작 ‘미나리’는 아카데미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가 되기도 했다. 백 대표는 영화 ‘미나리’에 특별히 마음이 꽂힌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저희 집은 아버지가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어머니와 저도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됐었죠. 영화 ‘미나리’에 나오는 가족의 이야기가 마치 저의 가족 이야기 같은 느낌도 있었어요. 저는 ‘미나리’는 12번 봤어요. 지난해 2월에 처음 보고 계약까지는 7~8개월이 걸렸죠. 처음에는 흥행이 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수상소식이 전해지고 관객들의 반응도 좋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건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게다가 6개 부문 후보로 올라서 깜짝 놀라고 너무 기뻤죠. 윤여정 배우가 한국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어요. 저희가 수입한 다른 영화인 ‘더 파더’의 올리비아 콜맨과 경쟁을 하게 됐네요.”

 

끝으로 백 대표는 자신과 같이 영화 수입·배급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을 전했다.

 

“영화를 수입‧배급하는 사업이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기에 우선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해요. 하지만 인생이 너무 쉽게 풀리면 재미가 없지 않겠어요? 사실 고생을 견디며 일을 해낼 때 성취감도 커지죠. 영화 배급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평소에 인문학적 식견을 높여서 시대의 취향 같은 것을 읽어내기 위해 관찰력과 호기심을 기르고 안목을 키우는 일이 중요해요. 어떤 일이든 성실과 끈기가 중요하고 이 분야도 마찬가지죠.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받아들이고 최선의 길을 찾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