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사물 묘사에 인간 교감 불어넣은 화풍이죠”

“그림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박정은 기자(jepark@skyedaily.com)

기사입력 2021-06-03 00:05:22

▲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석주 화가. 극사실주의 화가인 그는 벽, 일상 시리즈 등 현실의 단면을 표현한 작품을 통해 존재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사진=황정아 기자] ⓒ스카이데일리

“항상 그런 물음을 갖고 있었어요. 나란 존재는 뭐고,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하는 그런 물음들 말이에요. 제 작품의 기저에는 항상 이런 생각들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해요. 다른 화가분들은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제 작품을 통해 존재를 찾고, 그를 알아보려 노력하고 있어요.”

70년대 중·후반부터 극사실주의 묘사를 시작해 40년째 극사실주의 화풍을 고집하면서도 추상적인 표현을 곁들여 감정을 전달하려 노력하는 극사실주의 화가, 이석주 씨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현실과 연결되는 그림 그리고 싶었다”

이석주 화가가 극사실 묘사를 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때였다. 당시에는 화단 분위기가 추상적인 표현을 주로 하며 추상과 개념 미술을 했기 때문에 구상적인 극사실 묘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 화가는 그림이 보다 더 현실과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현실과 연결되는 그림,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극사실 요소를 가미하게 된 거죠.”

이석주 화가의 극사실주의 기법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8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벽’ 연작 시리즈가 세상에 공개되면서부터였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벽의 모습일 뿐이었지만 벽돌의 질감이나 흠집 하나까지 세밀하게 표현된 그의 벽은 많은 사람의 눈을 사로잡았다.

청년인 이석주 화가에게 벽이란 곧 스스로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답답하고 갈길 모르는 자신의 미래와도 같았다고 이 화가는 회고했다. 그의 벽은 개인으로서 스스로가 처한 현실을 반영하듯 캔버스를 가득 메운 채 일말의 틈조차 용납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대학을 막 졸업하니 현실이 암담했어요. 그때 당시라면 그림 그려서는 먹고 못 살죠. 비전도 없고요. 어느날 벽 앞에 서서 벽을 바라보는데 그게 내 처지랑 똑같은 거예요. 벽으로 이런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시간이 지나며 그의 현실은 암담함과 막막함에서 조금 벗어났다. 대신 매일 반복되는 틀에 박힌 생활의 현실적인 문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군중 속에서 존재감을 잃어가는 개체로서의 자신을 발견했다. 스스로의 존재를 찾으려는 노력은 한 발짝 떨어져 방관자의 입장에서 타인의 존재를 관찰하는 모습으로 표출됐다고 이 화가는 말했다.

“제가 중앙일보 장려상을 받은 작품이 있어요. 80년대 초에 그린 작품인데 제목이 3시 35분이에요. 왜 제목이 3시 35분이냐면 정확히 그 시간에 홍대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제 모습을 불현듯 발견했기 때문이죠. 그런 어떤 현실에 대한 자각, 내가 뭘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 같은 일상에 대한 자각을 표현한 거예요.”

▲ 극사실주의 기법을 시작한 계기를 설명하는 이석주 화가의 모습. 이 화가는 70년대부터 약 40년간 극사실주의 화풍을 고수해왔다. ⓒ스카이데일리

존재에 대한 의문 거쳐 초현실주의로 스스로의 내면 표현해

그는 이렇듯 벽과 일상이라는 주제 속에서 극사실주의 기법을 이용해 현실에 가장 가까운 그림을 그려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지나치게 현실적이기만 한 작품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너무나 현실적인 것들만 표현하다 보니 저 스스로의 감정이나 서정적인 것들이 표출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로 작품을 초현실주의 쪽으로 바꿨지요. 기차, 말, 시계 같은 오브제들을 종합적으로 조합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 것이지요. 엉뚱한 사물들이 서로 만남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연출하는 거예요. 그런 작업이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작업인 것 같아요.”

“지금도 극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지만 그런 묘사만 하니까 그림이 조금 경직되고 딱딱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추상적인 분위기라든가 표현적인 요소를 넣어서 느낌을 강조하려는 거예요. 극사실도 나름대로의 어떤 표정이 있겠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딱딱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을 보완하려 하고 있죠.”

이 화가의 초현실주의 묘사는 그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추가된 기법이다.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조금 딱딱하다고 느끼면서도 극사실주의 기법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 화가가 극사실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인간적인 교감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초현실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초현실주의 묘사는 저 스스로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결과물이에요.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 같은 경우에는 내면을 대단히 축소시켜 표현해요. 감성이라던가 내면의 얘깃거리를 차단하는 거예요. 저는 거기에 비하면 하이퍼리얼리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걸 좋아하거든요.”

“이런 작품의 변화에 특별한 분기점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 거죠. 젊었을 때는 다른 감정 없이 작업에만 몰두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내면의 고독, 인간의 갈등 같은 것들을 겪게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가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일상 같은 현실적인 부분에서 지금의 서정적인 것으로 작품이 변화해 간 거죠.”

‘사유적 공간’ 연작에서는 일상을 거쳐 줄곧 존재에 대한 의문을 표현해온 그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이 화가는 초현실주의 기법을 이용해 스스로의 가장 깊은 내면과 자아를 들여다보고 그 감정을 표현해냈다.

이 화가의 작품에는 시계, 말, 기차 등이 단골로 등장한다. 어떤 사물이 정확히 어떤 감정과 의미를 담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이 화가는 설명했다.

“제 작품에 나오는 시계들은 시간의 유한성을 상징하고 있어요. 본래는 시계를 도시의 상징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인간의 삶이란 결코 무한하지 않고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시계를 유한성의 상징으로 인식하게 되더라고요. 이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사물을 그려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지 않았나 싶어요.”

“말이라는 피사체가 시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주마등이라는 단어도 한자의 ‘말 마(馬)’를 쓰듯이 그렇게 지나가는 순간과 말의 움직임이 잘 어울릴 수 있는 것 같아요. 말이란 때로는 고귀하기도 하고 때로는 야성적이기도 하는 그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도 해요. 그런 부분들이 마음에 들어요.”

“기차는 자유로움과 일탈을 상징해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기분, 그런 것을 표현하는 거죠. 때로는 기차의 이미지 자체가 제게 굉장히 다이내믹하게 다가오기도 했는데요. 화면을 꽉 채운 기차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어요.”

▲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석주 화가의 모습. 극사실주의 묘사와 초현실주의를 가미한 이석주 화가의 그림에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사진제공=이석주 화가]

“그림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 화가는 극사실주의 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극사실주의 기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단면을 그리려는 노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어 현실로부터 조금 거리를 둔 채 스스로를 자각하려 했다며 그런 자세가 인간 군상과 거리 등을 표현할 때 많은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화가는 소설가나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문학적인 생각을 회화적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항상 고민해야 하죠. 그렇기에 회화적인 조형성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용적인 측면은 그 다음이죠. 제아무리 내용을 잘 담는다고 해도 시각적으로 타인에게 다가가야 하는 회화에 조형성이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조형적으로 맞아떨어져야만 시각적인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죠.”

이 화가는 언젠가 스스로의 생각과 시각적 조형성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작품을 그려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나이를 먹어도 좋은 작품에 대한 욕심은 커지기만 한다며 더 높은 단계를 위해 구상하고 작업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즐거운 일이라고 부연했다.

“그림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영화나 독서 같은 것으로도 몰입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단편적인 것에 불과해요. 하지만 작업은 달라요. 제가 매진할 수 있고, 흥미를 가질 수 있으니까요.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보면 나를 닮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어요. 만약 작업을 못했다면 우울증에 걸렸을 지도 몰라요. 젊었을 때는 쫓기듯이 작업을 했는데 이제는 너무나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지요.”

끝으로 이 화가는 나이를 먹은 자신이 젊은 그에 비해 더욱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됐다면서 앞으로도 작업에 있어 감정에 도취되지 않으면서도 내면을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지난해에는 작업에 대해서 굉장히 갈등이 많았어요. 너무 스스로 도취해서 시행착오가 많았던 거죠. 그러다 보니 작품 속에서 전달이 잘 안됐어요. 제 마음대로 안 된 거죠. 올해는 정말 이것저것 신경쓰지 않고 내 안에 푹 빠질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가 만족할 수 있고, 몰입할 수 있으면서도 소통이 가능한 그런 작업을 하는 게 제 목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