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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에서 사라진 왜나라 관련 글자들

패배한 일본이 고의로 글자 없앤 것으로 추정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22-01-12 10:20:55

▲ 성헌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393년에 왜가 신라를 침략해 도성인 금성(金城)을 포위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독산에서 참패를 당했다, 독산참왜(獨山斬倭)라 불리는 이 전투는 고구리와 관련이 없기에 호태왕비문에는 새겨지지 않았다.
 
이후 왜는 한동안 신라를 공격하지 않다가 6년 후인 399년에 다시 침략해왔다. 당시 상황이 호태왕비문에 상세히 새겨져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서 그간의 고구리와 백제간의 전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고구리사초략』에 따르면 395년(을미년)에 호태왕의 고구리 기병 7000명이 계속 도발을 일삼던 백제를 쳐서 패수(浿水)가에서 백제군 8000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말갈이 신라의 실직(悉直)을 침공했다고 한다. 이것이 세칭 신묘년기사로 잘못 알려져 있는 ‘破百殘曷侵新羅以爲臣民(고구리는 백잔을 깼고 말갈은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침공했다)’의 실체다.
 
여기서의 패수(浿水)는 고구리의 남쪽경계이자 백제의 북쪽경계인 동시에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하면서 건넌 강이며 일명 한사군전쟁의 주 무대로 하남성 제원(濟源)시를 흐르는 강이다. 중국 문헌에 기록된 격수(湨水) 또는 추수(溴水)와 같은 물길이다.
 
 
▲ 수경주 14권에서 설명한 패수의 물길과 일치한다. [사진=필자 제공]
 
복수에 불타는 백제 아신왕이 도발을 계속해오자 이듬해 396년(병신년)에 호태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의 성들을 정벌하고 도성까지 이르러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고 동생을 인질로 데리고 왔다.
 
『고구리사초략』에 “이 때 왜는 사신을 보내 토산물과 5명의 미녀를 바치면서 선록(仙籙)을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가 항복하는 극한 상황임에도 당시 왜는 전혀 개의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항복한 아신왕은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맹세를 어겼다. 이듬해 전지(腆支)태자를 왜에 볼모로 보냈고 왜왕은 전지를 사위로 삼는 등 교혼(交婚)으로 뭔가를 엮으려고 했지만 왜 역시 천명을 알기에 감히 위엄을 범하지 못하고 성심으로 공물을 바쳤다고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돼있다.
 
신라를 재침한 왜
 
호태왕비문 9년(399, 기해년) 비문에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왜인들이 국경에 가득 들어와 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노객(奴客)을 백성으로 삼으셨으니 왕께 구원을 청하나이다’라고 아뢰었다. 태왕은 그 충성을 다시 헤아려 은혜를 베풀어 사신에게 돌아가서 병력출동을 허락했음을 고하라고 했다”는 문구가 있다.
 
『고구리사초략』에는 “5월 왜가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니 신라에서 병력을 내어 구해주시기를 청했다. 상이 서구에게 명해 기병 5000명을 출동시키려고 했더니 내밀(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왜가 이미 물러갔음을 고했다”고 기록돼있다.
 
이듬해 호태왕 10년(400년, 경자년) 2월에 왜가 신라를 침공해왔다. 자세한 내용은 호태왕비문에 새겨졌을 테지만 이미 관련 내용이 아래 □처럼 삭제돼 있다. □는 호태왕이 신라를 침략한 왜군을 격퇴한 내용인지라 당시 패자였던 일본인들이 고의적으로 글자를 없애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官兵由新羅躡踵追來背急迫至任那加羅從拔城城即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城倭□□潰城□□□□□□□□□□□□□死者十之八九盡臣率來安羅人戍兵
□□□□□□□□□□□□□□□□□□□□□□□□□□□□□□
□□□□□□□□□□□□□□□□□□□□□□□□□□□□□□□□□□□安羅人戍兵”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해 영업적으로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느낌도 없지 않다”고 언급돼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 비만 오면 호태왕비에서 흘러내리는 석회. [사진=필자 제공]
 
호태왕비를 처음 발견한 일본 관동군 소속 사코오(酒內景信) 중위는 1883~4년경 비문의 해독을 위해 탁본을 본국에 보내고 훈령을 기다렸을 것이다. 한학자도 아닌 그가 즉석 해독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후 본국의 지시에 의해 호태왕비문의 왜 관련내용이 새겨진 위 □ 글자들이 정에 쪼여지고 다른 글자로 변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895년 5월에 호태왕비를 답사해 비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조선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桂延壽) 선생이다. 그는 한학에 능통했기에 탁본할 필요도 없이 즉석에서 비문의 내용을 필사하고 해독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1912년 다시 호태왕비를 답사했을 때 비문의 왜 관련내용인 □글자들이 사라져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전에 필사해두었던 내용을 정리해 세상에 전하니 이름하여 비문징실(碑文徵實)이라 한다. 그 내용은 제자 이유립(李裕岦) 선생의 대배달민족사(大倍達民族史)에 수록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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