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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왕이 석씨왕조에 편입된 이유

기림왕의 사적을 보면 석씨왕조가 아닌 박씨왕조를 입증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22-02-09 10:03:38

 
▲ 정재수 역사 작가
신라 15대 기림왕은 석씨왕조 후반기(유례-기림-흘해)의 두 번째 왕이다. 아버지는 이찬 걸숙(乞淑)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기림왕을 조분왕(11대·석씨)의 손자로 설정하며 또한 아버지 걸숙도 조분왕의 손자로 적고 있다(一云 乞淑 助賁之孫也). 세대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부자지간인 걸숙과 기림왕이 실제 석씨인지 조차도 다소 불분명하다. 기림왕의 사적(史蹟)은 크게 세 가지다. 비열홀 순행, 태백산 망제 실시, 국호 ‘신라’로의 환원 등이다.
 
비열홀 순행과 태백산 망제 실시
 
『삼국사기』 기록이다. ‘3년(서기 300년) 2월, 비열홀(比列忽)을 두루 돌아보며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몸소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차등있게 나눠줬다. 3월,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다(三年 二月 巡幸比列忽 親問高年及貧窮者 賜穀有差, 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兩國歸服).’
 
기림왕은 재위 초기 친히 북쪽으로 비열홀을 순행하며 노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는 등 위무행사를 실시하며 또한 우두주의 태백산에 들러 망제를 행한다. 비열홀은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으로 옛적에 동예가 소재한 지역이다. 당시 비열홀은 고구려 영역에 소재한 신라의 알박기 땅이나 마찬가지다.
   
▲ 박혁거세 출자 계보도 [사진=필자 제공]
      
기림왕은 무슨 연유로 비열홀까지 친히 찾아간 걸까? 비열홀은 시조 박혁거세와 관련이 깊다. 북부여 고두막한(5대)의 딸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婆蘇)는 섭라국(요동반도 남안) 여왕으로 있으면서 폐신 혁서거(奕西居)과 연을 맺어 박혁거세를 임신한다. 혁서거의 출신이 바로 비열홀이다. 과거 안변(비열홀)에는 안변 혁씨의 집성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혹여 기림왕은 신라 원조 혁서거의 고향을 찾아가 그의 후손들을 특별히 위무한 것은 아닐까?
 
비열홀 위무 순행을 마친 기림왕은 곧바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에 올라 망제를 지낸다. 망제(望祭)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상의 무덤이 있는 쪽을 향해 올리는 제사다. 기림왕이 제사를 지낸 조상은 시조 박혁거세보다는 박혁거세의 아버지 혁서거일 것이다.
 
현재 강원도 태백산 정상부에는 3개의 천제단이 있다. 정상의 방형(네모) 천제단(천왕단)을 중심으로 북쪽 아래에 원형 천제단(장군단), 남쪽 아래에 각형(세모) 천제단 등이다. 기림 왕이 망제를 올린 제단은 3개 제단 중 하나일 것이다. 정상의 방형 제단이 유력해 보인다.
 
특히 『삼국사기』〈잡지〉 제사 조에는 신라의 북쪽에 위치한 태백산을 중사(中祀)를 지낸 신라의 오악(五岳) 중 하나로 적고 있다. 기림왕 시기 망제를 지내며 태백산이 제사 지내는 장소로 중시됐음을 알 수 있다.
    
▲ 태백산 소재 천제단. [사진=필자 제공]
         
국호 ‘신라’로의 환원
 
기림왕은 국호를 ‘신라’로 환원한다. 『삼국사기』 기록이다. ‘10년(서기 307년) 국호를 다시 신라(新羅)로 했다(十年 復國號新羅).’ 『삼국사기』는 전후 설명없이 결과만을 적고 있다.
 
그러나 『신라사초』는 명확한 사유를 밝히고 있다. 〈기림이사금기〉이다. ‘9월 다시 지진이 일어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다치니 (아이혜 후가) 흘해(訖解)를 부군(副君)으로 삼기를 청하여 제(기림왕)가 허락했다. 부군이 꿈에 백마(白馬)를 보아서 국호를 다시 신라(新羅)로 했다(九月 又震 壞屋傷人 帝乃請以訖解爲副君 許之 以副君夢見白馬 复號新羅).’ 기림왕은 부군 흘해(훗날 흘해왕)가 꿈에 백마를 본 사유를 들어 국호를 ’신라‘로 환원한다. 백마는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에 등장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이전 국호는 김씨왕조 미추왕이 들어서면서 바꾼 계림(鷄林·김알지 닭)이다. 원래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지로 알려진 나정(羅井)을 조성하면서 만든 국호이다. 신라(新羅)는 ‘나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백마를 꿈에 보고 국호를 신라로 환원한 기림왕의 조치는 김알지(닭)에서 다시 박혁거세(백마)로의 귀복을 의미한다.
 
기림왕이 석씨왕조에 편입된 이유
 
이처럼 석씨왕조라는 기림왕의 사적은 온통 박씨왕조(박혁거세)와 연관된다. 기림왕은 석씨가 아닌 박씨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기림왕은 무슨 이유로 석씨왕조에 편입된 걸까?
  
▲ 경주 나정과 천마총 백마도. [사진=필자 제공]
    
기림왕의 아버지 걸숙(乞淑)은 박씨이다. 다만 어머니 아이혜(阿爾兮)는 내해왕(10대)의 딸인 석씨로 조분왕(11대), 첨해왕(12대), 미추왕(13대) 등 3대에 걸쳐 왕후가 되며 석씨왕조를 좌지우지한다. 이런 까닭에 기림왕은 부계혈통이 아닌 모계혈통에 따라 석씨왕조 일원으로 편입된다.
 
기림왕이 석씨왕조에 포함된 이유는 모계혈통을 중시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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