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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판결로 올 하반기 파국 예고된 한일 관계
단기적 대응과 별도로 역사 속에서 지혜 찾을 필요
서로 영향 받는 관계였고 역사적 우월감이 비극 초래
한중관계가 우리의 경제 우위로 역전된 사례 기억해야
살벌한 강대국 틈에 국력으로 생존 모색이 우리 운명
한일 관계가 최악이다. 외교는 상대방이 아무리 밉더라도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하고 마주 앉아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 최소한의 기본조차 사라졌다. 충돌도 불사하겠다며 마주 달리는 기관차 같다. 징용 배상 재판과 관련해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가 예상되는 올 하반기에는 더 큰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갈등은 위안부와 강제 징용 문제 등 과거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한일 관계에서 과거사 문제는 앞으로도 반복될 공산이 크다. 이런 측면에서 시야를 넓혀 한국과 일본이 수 천 년에 걸쳐 이어져온 관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 대응과는 별도로 오랜 역사에서 지혜를 찾는 노력을 병행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한일 관계에 대한 인식은 제한적이다. 주로 임진왜란과 일제의 식민 지배 등 피해를 당했던 역사를 기억하거나, 한국이 초창기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해줬다는 문화적 우월감을 갖고 있는 정도다. 일본 사회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느낌을 갖는 때가 많다. 별로 알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모르고 싸움에 이길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한일 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밀접하게 전개되어 왔다는 점이다.
일본 역사교과서는 일본 열도가 원래는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빙하시대였던 1만2000년 전에 동해는 거대한 호수였고 주변은 육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보다 해수면이 약 100m 낮았던 시기였다. 한국의 부산 남쪽은 대마도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 북해도는 사할린 반도와 이어져 있었다. 빙하가 녹으면서 바다 수위가 높아지기 전까지 이동은 자유로웠을 것이다.
본격적인 교류는 기원전 5세기 한반도에서 살던 사람들이 벼농사와 청동기 기술을 갖고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고고학자들이 이들의 DNA를 조사한 결과 한반도 사람들과 매우 높은 유사성이 발견됐다. 일본이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농경시대와 청동기, 철기 시대를 열게 한 주역들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도 일본과 활발히 교류했다. 백제와 일본 교류의 정점은 663년 백제와 일본 연합군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과 격돌한 백강(白江) 전투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아키히토 전임 일왕(日王)은 간무 일왕(737-806년)이 백제계 어머니를 두었다는 속일본기(續日本記) 기록을 거론하며 “한국과의 연을 느낀다”고 말했는데 그 어머니는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유민의 후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가야와 일본의 교류는 한 때 임나일본부 논쟁(일본이 가야를 지배하기 위해 임나일본부라는 정치조직을 가야 현지에 두었다는 학설이 제기되었으나 지금은 부정됨)을 부를 만큼 빈번했다. 제철(製鐵) 기술로 널리 알려진 가야는 당시 철 생산 능력이 없었던 일본에 철을 수출했고, 일본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가야에 상주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항해술과 조선술이 지금보다 훨씬 낙후됐던 시기에 바다를 통한 인적 교류가 일상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후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 정벌, 1592년 임진왜란, 1910년 일제의 식민 지배 등 굵직한 사태들이 한일 간에 계속 이어지게 된다.
역사적 사실의 나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와 일본 측의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일본에서 ‘도래인’이라고 불리는 한반도 이주민의 역할은 앞서 언급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 대륙에 당나라라는 강력한 통일국가가 등장하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위기감을 느끼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체제 정비에 나선다. 연개소문 김춘추 같은 거물들이 이 때 등장한다. 일본 역시 같은 배경으로 일본 최초의 정치개혁인 ‘다이카 개신’을 시도한다. 오래 전부터 동아시아 지역은 서로 맞물려 움직이는 연결 구조였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한일 관계는 일본 내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일본 침공은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1185-1333년)를 붕괴시켰다. 몽고를 물리치긴 했으나 전후 처리의 과정에서 막부 내부의 취약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고 에도 막부(1603-1867년)가 탄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중국에서도 명나라 멸망과 청나라 건국으로 연결됐다. 한편으로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는 일본 제국주의의 참담한 패망으로 귀결됐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 중 하나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역사적 우월감이다. 우리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제상(363-419년) 일화에서 신라 눌지왕의 동생인 미사흔이 일본에 인질로 간 것은 일본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인질은 힘이 약한 쪽에서 강한 쪽에 보내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고대사에서 한반도 남부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일본 역사자료에 여러 군데 나온다. 백제나 가야가 일본의 군사력 지원을 받으려 한 것도 당시 일본 국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이나 일제의 식민 지배는 이런 연장선에서 일어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일본도 달라지지 않았음은 최근 수출 규제 사태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의 경우 한국을 대대로 조공국가로 취급해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드라마틱한 반전이 이뤄졌다. 2004년 동북공정으로 한국에 반중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중국은 급히 한국에 특사를 파견하면서 수습에 나섰다. 한중 관계에서 중국이 한국에 먼저 손을 내민 의미 있는 사건이다. 그래봐야 한국의 우위는 1970년대 우리의 경제발전 이후 30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2017년 한국의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여러 차례 ‘혼밥’을 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힘의 관계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국민들은 새삼 확인했다.
한일 관계도 결국은 국력 싸움이다. 국토와 인구가 일본이나 중국보다 적다고 지레 패배의식에 빠질 일은 아니다. 이제는 강한 나라의 여부가 외형적 규모로 결정되지 않는 4차 산업의 시대다. 과거사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힘을 갖추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이웃의 꼴이 보기 싫어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고 판단되면 내가 멀리 이사를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국가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살벌한 강대국 틈에서 살아가는 한 그들에 맞서는 힘을 가져야 생존을 확보할 수 있다. 진부한 결론이어도 우리의 운명이자, 역사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가장 실효적 처방이다. 올해 하반기 벌어질 사태에서는 ‘죽창가’가 아니라 ‘냉철한 극일(克日)’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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