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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왕(昆支王)은 5세기 한일고대사에 있어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많지 않은 기록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사서에 공통으로 등장한다. 특히 곤지왕의 직계후손이 살았던 야마토 중심지역인 일본 오사카 가와치아스카(河內飛鳥)에는 아스카베(飛鳥戶) 신사가 천년 이상 유지돼오고 있다.
곤지왕의 아들 중에는 동성왕(24대-둘째)과 무령왕(25대-다섯째)이 있다. 백제 멸망을 가져온 의자왕도 곤지왕계이다. 또한 일부이기는 하나 곤지왕을 당시 야마토 웅략(유라쿠-21대)왕으로 해석하는 설도 있다. 아마도 이러한 사유들도 인해 곤지를 왕으로 칭한 듯하다. 필자는 곤지왕을 ‘백제(百濟) 곤지왕’ 또는 ‘아스카(飛鳥) 곤지왕’이라 부르고자 한다.
곤지왕은 비유왕의 적자
곤지왕 여곤(餘昆)은 백제 20대 비유왕 여비(餘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야마토 귀족출신인 위이랑(韋二娘-갈성위전 딸)으로 추정된다(『신라사초』<눌지천왕기>). 곤지왕은 428년(비유왕 2년) 한성에서 출생한다.
곤지는 ‘크다’는 뜻의 ‘곤(昆)’과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마한어인 ‘지(支)’로 이뤄졌다. 따라서 ‘昆支’는 ‘큰 우두머리’ 즉 ‘대왕(大王)’을 가리킨다. 곤지는 서열상으로는 비유왕의 넷째 아들이지만 비유왕이 즉위(427년) 후 얻은 첫째아들이기도 하다. 비유왕의 적자(嫡子)이다. 이전 여경(餘慶-개로왕), 여은(餘殷), 여기(餘紀) 등 3명은 비유왕이 즉위전에 백제 귀족가문들과 혈연적 결합을 통해 얻은 아들들이다. 그래서 비유왕은 즉위 후에 낳은 적자이기에 대왕의 뜻을 가진 곤지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다.
두 차례 정치적 숙청 과정
그러나 곤지왕은 비유왕을 계승하지 못한다. 비유왕의 처 수마(須馬) 왕비가 남편 비유왕을 살해하고(『삼국사기』-흑룡출현사건)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한 첫째 아들 여경(경사-개로왕)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곤지왕은 계모 수마태후와 이복형 개로왕(21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핍박을 받는다. 핍박은 두 차례 정치적 숙청으로 이어진다.
1차 숙청은 좌현왕(左賢王) 임명이다. 개로왕은 458년(개로왕 4년·곤지왕 31세) 곤지왕을 좌현왕에 임명해 한성의 중앙정계에서 축출한다. 대륙사서 『송서』<이만열전> 백제편에 나온다. 개로왕이 유송 세조(효문제)에게 장군 군호를 요청해 받은 11명의 명단에서 확인된다. 8명은 왕족 여(餘)씨이고 나머지 3명은 목(沐)씨, 미(麋)씨, 우(于)씨이다. 이 중 정로장군 군호를 받은 좌현왕 여곤(餘昆)이 바로 곤지왕이다.
좌현왕의 관할지역은 한반도 서남부지방인 전남지역이다. 좌현왕의 치소가 있는 전남 영암일대 옛 지명은 곤미(昆眉)이다. 영암군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 곤일시(昆一始)면(미암면), 곤일종(昆一終)면, 곤이시(昆二始)면(학산면), 곤이종(昆二終)면(서호면) 등으로 구성된다. 바로 곤미의 옛 땅이다. 모두 ‘昆’자가 들어간다. 물론 ‘昆’자가 곤지(昆支)를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昆’자 지명은 곤지왕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는 한때 곤지왕이 좌현왕에 보임되어 이 지역을 다스렸기 때문에 ‘昆’자 지명이 전해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
『송서』에는 좌현왕 여곤(곤지) 말고도 우현왕 여기(餘紀)도 나온다. 여기는 비유왕의 셋째 아들이며 곤지의 배다른 형이다. 우현왕의 관할지역은 대륙 요서지방(화북성/요녕성 일부)이다. 백제군(요서군/진평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2차 숙청은 일본열도로의 추방이다. 개로왕은 461년 좌현왕 곤지를 한성으로 불러들여 야마토 파견을 명한다. 『일본서기』<웅략기>에 나온다. 개로왕은 야마토 조정에 보낸 채녀(采女)가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켜 백제의 위신을 실추시켰으니 대신 아우 곤지왕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야마토왕을 섬기라고 강권한다.
개로왕의 명을 받은 곤지왕은 461년(개로왕 7년곤지왕 34세) 일족을 데리고 일본열도로 건너간다. 당시 야마토는 웅략(雄略-유라쿠)왕의 치세이다. 웅략왕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구축한다. 특히 463년 길비(吉備-기비)씨 난을 평정하며 군정국가 야마토를 왕정국가 체제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다. 곤지왕은 웅략왕의 군사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곤지왕의 별칭 ‘군군(軍君)’은 개인의 군사적 역량과 야마토에서의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반영한 호칭이다.
귀국 후 활동과 죽음
곤지왕은 15년간 야마토에 체류하다 49세가 되던 476년 야마토 지원군을 이끌고 급거 귀국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벌(475년)로 한성이 함락됐기 때문이다. 특히 곤지왕은 신라에 파견돼 신라 자비왕이 주선한 고구려와의 정전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장수왕의 남진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우 문주왕(22대)을 적극 보좌하며 백제 재건에 힘쓴다. 그러나 곤지왕의 활동은 갑자기 중단된다. 477년(문주왕3년·곤지왕 50세) 7월, 곤지왕을 경계한 문주왕의 왕비 오로지(吾魯知)에 의해 곤지왕은 암살당한다.
한일 고대사의 중심인물
학계는 461년 야마토 파견에 초점을 맞춰 곤지왕을 평가한다. 곤지왕의 파견을 청병사(請兵使)로 보는 해석이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벌전쟁을 대비하여 백제가 사전에 야마토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을 무리하게 꿰맞춘 불편한 해석이다. 15년 후에 일어난 장수왕의 남벌전쟁을 미리 예상해 곤지왕을 파견했다는 논리는 지나친 비약이다.
곤지왕의 야마토 파견은 청병을 위한 외교적 행위가 아니다. 단지 곤지왕의 정치적 숙청일 뿐이다. 그럼에도 곤지왕은 야마토에 15년간(461~475) 체류하는 동안 야마토의 성장 발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며 장수왕이 남벌전쟁을 단행하자 백제를 지키기 위해 야마토지원군을 이끌고 귀국한다.
곤지왕은 한일 고대사의 열쇠를 쥐고있는 중심인물(key man)이며 또한 공통분모(common denominator)이다. 백제(한국)와 야마토(일본)로 분리된 부여씨 왕조의 두 개의 병렬축은 곤지왕에 의해 다시금 하나의 직렬축으로 재조정된다. 곤지왕은 야마토 발전과 백제 구원(재건)이라는 역사가 요구하는 시대적 소임을 충실히 수행한다. 곤지왕의 활약으로 부여씨 왕조의 두 축인 반도 백제와 열도 야마토는 결코 무너지지않고 계속해서 역사를 이어간다.
5세기 백제와 야마토의 격변 속에는 백제 곤지왕이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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