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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2일 87세의 일기로 작고한 행크 애런은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영원한 홈런왕’으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아프리카계 흑인인 애런은 어려서부터 숱한 인종차별과 멸시를 받고 성장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결국 MLB 최고의 야구선수로 등극했다.
그는 1974년 4월 백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전설적인 야구 선수인 베이브 루스의 714호 홈런 기록을 깨뜨리고도 환호를 받지 못했다. 대기록을 작성한 순간 일부 백인 팬들은 경기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경기장에 난입하기도 했다. 오히려 백인의 대기록을 흑인이 깨뜨렸다는 이유 하나로 시기와 원망의 대상이 돼 버렸다. 심지어 최다 홈런 대기록을 깨뜨리기 전에는 살해 위협을 받아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715호 홈런을 친 뒤 소감을 묻는 말에 애런의 일성은 “이제야 끝났다”였다. 살해 위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케 했다. 백인들의 전유물 같던 메이저 리그에서 흑인선수로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 그의 멘탈이 참으로 강했으리라 생각되는 대목이다.
골프공에 나일론 감아 야구공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인종차별이 심한 앨라배마에서 성장한 애런은 어려서부터 잔디를 깎고, 얼음을 배달하는 허드렛일로 생계를 보태며, 야구에 대한 꿈과 열정을 키웠다. 야구공 값이 너무 비싸 애런은 못쓰게 된 골프공을 얻어다가 나일론으로 칭칭 감아 타격 연습에 몰두했다. 야구 지도자였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또래들에 비해 야구실력이 출중했지만 그는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일절 야구를 하지 않았다. 인종적 차별은 극심했고, 백인 학생들만이 고등학교 야구팀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애런은 야구와 비슷한 소프트볼 팀에서 활약한 게 전부였다.
그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야구팀이 아닌 미식축구 팀에 들어갔다. 격렬한 미식축구를 하면서 부상을 당하고 야구선수로서의 꿈을 위태롭게 할까봐서 그는 3학년 때 수업을 빼먹게 됐고, 그 이유로 퇴학을 당하였다.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애런은 흑인들로만 구성된 세미프로팀 모빌 블랙 베어스의 감독 에드 스코트의 눈에 띄어 주목을 받게 됐다. 애런의 천재성을 확인한 스코트 감독은 애런을 자신의 친구인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NLB)의 아메리칸 리그 인디애나폴리스 클라운스의 맥킨리 다운스에게 소개시켰다. 당시만 해도 흑인이 프로야구의 최상급인 메이저 리그에서 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메이저 리그 팀에 선발된 재키 로빈슨이 흑인 최초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함으로써 메이저 리그의 인종 장벽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선수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던 상태였다. 메이저리그의 하부리그를 전전하며 실력을 과시하던 애런이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레이브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은 1954년의 일이었다.
메이저리그 데뷔 열흘만에 홈런포
1954년 스프링 캠프에서 주전 좌익수 보비 톰슨이 발목을 골절당하면서 애런에게 행운이 찾아들었다. 꿈에 그리던 메이저 리그에 입성한 애런은 데뷔 후 열흘만에 자신의 메이저 리그 첫 홈런을 쳐냈다. 메이저리그 홈런왕의 역사적인 첫 출발이었다. 애런은 이후 매년 30개 이상의 홈런을 뿜어내며 이름을 떨쳤지만 초심과 겸손함을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1960년대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성장한 애런은 1968년 7월 14일 홈구장인 애틀랜타 스타디움에서 자신의 500번째 홈런을 쳤다. 3만4000명이 넘는 관중이 그에게 몇 분 동안 기립박수를 보냈지만 베이브 루드의 홈런기록을 깨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애틀랜타는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이 극심한 지역이었다. 그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베이브 루스의 대기록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하며 1914년부터 20년 동안 투수와 외야수로 활약한 베이브 루스였다.
애런은 불과 3년도 채 안돼 600번째 홈런을 쳤고, 그의 나이 39세이던 1973년 7월21일에는 700번째 홈런을 날리며 미국 전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후 베이브 루스의 홈런기록을 깨기 위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9월 29일에는 자신의 시즌 40번째 홈런인 통산 713번째로 홈런을 날려 한 개 차로 따라붙었지만 더 이상의 홈런이 나오지 않은 채 해가 바뀌었다.
비(非)시즌 동안에 애런은 백인 영웅 베이브 루스의 기록이 깨지는 걸 두려워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보낸 온갖 협박편지로 위협을 당했다. 이로 인해 개인으로서 역사상 가장 많은 우편물을 받은 인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최상의 영예와 최악의 모욕을 동시에 경험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해가 바뀌어 베이브 루스의 홈런기록이 깨지는 것은 당연했고, 초읽기에 들어갔다. 언제 대기록이 수립되는지에 관심이 쏠렸다. 1974년 4월 4일 베이브 루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714호를 터뜨렸고, 4일 뒤 애런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새로운 역사를 썼다. 이후에도 그의 홈런 퍼레이드는 계속되었다. 그는 42세이던 1976년까지 22년간 뛰며 통산 755개 홈런을 기록하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슬럼프 없는 꾸준함의 대명사
애런에게는 베이브 루스에게서 볼 수 있었던 화려한 면모는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시즌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적도 없었으며, 언론의 주목을 크게 끌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매년 슬럼프 없이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그랬기에 역대 선수 중 통산 홈런·타점·장타수·누타수(Total Bases) 등에서 1위, 안타수 3위에 오르는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다.
애런은 훌륭하고 뛰어난 야구 실력도 갖추고 있었지만 유니폼을 벗고 사회에 나와서도 항상 선한 영향을 끼치면서 한 평생을 살았다. 그가 존경을 받는 이유다. 비폭력주의자였던 애런은 특히 흑인 인권운동과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의 인내와 높은 정신력을 기려 애런이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깬 25주년을 맞아 1999년 2월 ‘행크 애런 상’의 창설을 선언했다. 이 상은 아메리칸과 내셔널 리그 통틀어 최고 타자들에게 해마다 수여되고 있다. 흑인으로서는 처음 이름을 따 제작된 상이었다.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흑인운동
1982년 한국 프로야구 팀들과의 친선경기를 위해 마이너리그 올스타 팀의 단장 자격으로 방한한 애런은 당시 받은 초청료 전액을 주한미군에 기부하기도 했다. 남북전쟁 때 남부군의 본거지였던 애틀랜타를 연고로 하는 브레이브스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흑인빈민 운동에 앞장섰다.
애런은 숫자상으로도 대기록을 작성했지만 온화한 성품과 인성은 대단했다. 야구의 상징적인 존재였지만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팬들에게 모범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이달 초 흑인들이 백신에 대한 불안감과 거부감을 갖자 솔선해서 공개적으로 백신 접종에 나섰다. 그가 타계하기 불과 2주 전이었다.
선수시설에는 홈런타자로, 은퇴 후에는 흑인 인권 운동가로 활약한 애런이었다. 이제는 차별도 없고 아픔도 없는 곳에서 영면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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