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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헌의 스포츠 세상

‘영원한 메이저 리거’로 불리는 클레멘테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5-06 09:15:25

 
▲박병헌 전 세계일보 체육부장
/중남미 1세대 야구선수로 최고의 성적
/훌륭한 인품에 열성적 사회봉사로 귀감
/MLB 선수들의 최선망인 '클레멘테 상'
/49년 전 구호품 전달 비행기 사고 사망
/33년만 아들이 자선사업 부친 뜻 이어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모든 선수들이 가장 선망하는 상 가운데 하나가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이다. 매년 시즌이 끝난 이후 자선봉사 등 사회공헌 활동에 앞장선 선수에게 수여한다. MLB 최초의 히스패닉계 선수였던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1973년부터 매년 수여되고 있다. 1972년 12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된 클레멘테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다.
 
중남미 야구 선수들의 우상
 
클레멘테는 중남미 출신 1세대 선수였다. 현재는 MLB 등록 선수 가운데 30%가량 되는 중남미 출신들의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은 존재이며,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클레멘테다. 클레멘테가 선수시절 달았던 배번 21번은 그들이 가장 달고 싶어 하는 번호다. 클레멘테는 선수시절 훌륭한 성적뿐만 아니라 인품, 사회봉사 정신으로 MLB 선수들의 귀감이 된 위대한 야구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클레멘테는 1955년 MLB 피츠버그 파이리츠 소속으로 데뷔한 이후 사망할 때까지 18년 동안 팀의 중심타자로서 맹활약했다. 통산 12번이나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으며, 포지션별로 최고 선수를 선발 수상하는 골든 글러브에도 12차례 뽑혔다. 1966년에는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했고, 1960년과 1971년에는 피츠버그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큰 힘을 보탰다. 꿈의 성적인 통산 타율 3할1푼7리, 3000안타를 돌파했다. 그라운드 밖에서는 남 몰래 자선사업을 벌여온 그는 당대 최고의 기량과 동시에 훌륭한 인품을 갖춘 선수였다.
 
어려서부터 야구 선수가 꿈
 
클레멘테는 1934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어렸을 적부터 육상 단거리와 창던지기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의 진짜 꿈은 야구선수였다. 어린시절 LA 다저스의 우익수 칼 푸릴로를 가장 좋아했던 클레멘테는 매일 몇 시간씩 벽에다 고무공을 던지며 어깨를 단련했고, 이는 훗날 MLB 역대 최고의 송구 능력을 자랑하는 외야수가 되는 밑거름이 됐다.
 
푸에르토리코 프로 팀에서 뛰고 있던 18세 클레멘테의 재능을 가장 먼저 발견한 구단은 다저스였다. 당시 다저스는 라틴 아메리카 시장 개척에 나선 팀들 중 선두 주자였다. 다저스보다 한발 늦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3만달러라는 당시 거액의 금액을 제시하여 입단 보너스까지 제시했지만 클레멘테는 의리와 신의를 존중해 자신을 먼저 알아봐 준 다저스 구단과 1만달러에 계약했다.
 
하지만 다저스에는 흑인 선수들이 넘쳐났고, 클레멘테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채 2년 만에 피츠버그로 트레이드 되었다. 숨질 때 까지 줄곧 ‘해적들’의 유니폼을 입은 것 또한 의리 때문이었다. 영어가 서툴러 미국 생활 및 MLB 선수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그는 흑인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으며, 경기장 안에서는 갖은 협박과 빈볼(투수가 타자를 위협하기 위해 타자의 머리를 향하여 던지는 투구)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지만 이방인으로서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꾹 참았고,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가벼운 방망이에서 무거운 방망이로 교체한 클레멘테는 1961년 0.351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왕 자리에 올랐고 23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그 이후 1960년부터 그가 비운의 사고로 유니폼을 벗는 1972년까지 메이저 리그 13년 생활동안 1968년(타율 0.291)을 빼고는 타율이 0.312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교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구호물품 군사정권이 착복
 
1972년 시즌이 끝나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12월 23일 니카라과의 수도인 마나구아 지역에 진도 7.2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공식적인 사망자 숫자만도 1만2000명에 달한다. 평소에도 사회봉사에 매우 헌신적이었던 클레멘테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헌신했다. 하지만 클레멘테가 보낸 구호품은 두 번 모두 니카라과 이재민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푸에르토리코 군사정권이 중간에서 부정으로 가로챘기 때문이었다. 12월 31일 클레멘테는 3번째 구호품과 함께 직접 비행기에 올랐다. 낡은 DC-7 수송기에는 식량과 생수 등 구호품이 2톤 넘게 실려 있었다.
 
이륙 후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 엔진에서 갑자기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일어났다. 그리고 비행기는 바다로 추락했다. 수송기에 탑승한 5명 중 조종사의 시신만 발견되었고 클레멘테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클레멘테는 그렇게 38세의 한창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숭고한 정신 곳곳에 살아 숨쉬다
 
비보가 알려지면서 그의 고향 푸에르토리코 국민들은 물론 중남미국가 사람들 역시 평소 ‘영웅’같은 존재로 여겼던 클레멘테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과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3일간의 국민 애도기간을 정하며 그를 추모했다. 미국 정부도 이에 뒤질세라 그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우표를 발행했고, MLB 사무국은 9월 9일을 클레멘테 데이로 지정해 매년 그의 정신을 받들고 있다. MLB 사무국은 ‘명예의 전당’ 헌액 사상 처음으로 5년간의 유예기간을 면제하고 이듬해 곧바로 그를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그의 박애정신과 사회 봉사정신을 기리기 위한 작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푸에트토리코 정부는 2000년 그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다목적 경기장인 클레멘테 스타디움도 건립했고, 2012년 5월 프로야구 리그의 명칭을 클레멘테의 이름을 따 바꾸었다. 그가 몸담았던 피츠버그 구단은 피츠버그시를 가로지는 알레게니강 위에 설치된 다리를 클레멘테라고 명명했다.
 
클레멘테가 세상을 떠난 지 33년이 지난 2005년 니카라과에 대지진이 일어나 그의 아들이 똑같은 구호물품 2톤가량을 싣고 니카라과로 가려고 했지만 대지진 및 쓰나미로 비극을 맞이했던 동남아시아가 더 급하다고 판단해 직접 가서 전달해 주었다.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대를 이어 실천한 숭고한 자선사업이었다.
 
아들 역시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지만 부상으로 인해 은퇴를 한 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클레멘테의 아들은 그의 고향에 ‘로베르토 클레멘테 센터’를 설립해 어린이들에게 아버지의 봉사정신과 야구인으로서의 꿈을 심어주고 있다. 클레멘테가 하늘로 떠난 지 약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영웅’으로 모두의 가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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