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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정치 쪽에 발 들이는 경제
/美조지아주 투표법 개정이 촉발해
/5년간 손볼 방법이 없는 정치보단
/바로바로 고개숙이는 경제가 편해
‘일장춘몽(一場春夢)’.
인생은 한바탕 허탈한 꿈이라고 한다. 이대남, 이대녀 시대에 이런 사자성어를 쓰면 라떼남 소리 듣기 딱 좋다. 근데 요즘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서 꿈같이 엉뚱한 장면을 한번 생각해 봤다. 삼성이 정부한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다.
“그건 옳지 않네요.”
지난 주 끝난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북핵과 더불어 반도체, 배터리, 백신 등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이들 제품의 개발과 발전에 바이든, 문재인 두 대통령이 직접 기여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두 대통령은 마치 자기 것인 양 반도체 등을 테이블 위에 놓고 밀고 당겼고, 마지막엔 “합의했다”며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정작 이런 걸 발전시키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수감돼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삼성이 감히 “그건 옳지 않네요”라고 말하는 건 일장춘몽인 것이다. 수감 중인 이재용 부회장의 선친은 “정치는 4류, 공무원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했다가 곤욕을 치렀었다.
‘NO’라고 말하기 시작한 코카콜라
라떼 세대에게 기업 하면 생각나는 표현은 ‘재벌과 독재정권의 결탁’ ‘노동자의 고혈을 빨아먹는’ 등이다.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기업들이 정치와 사회를 향해 ‘NO’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상황은 별로고, 그런 모습을 머리에 그려보는 것도 어색하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에서는 기업이 정치에 ‘NO’하는 일이 벌어졌다. 흔한 표현으로 ‘코카콜라 민주주의’다. 코카콜라 등 미국 글로벌 기업들이 정치에 “그건 옳지 않다”고 직접, 공개적으로 경고한 것이다. 민주정체를 수호하는 주체가 언제 정치에서 기업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뒤틀린’ 관계가 트럼프가 물러난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기업들이 반대한 것은 3월 개정된 조지아주 ‘투표법(Voting Law)’ 이다. 미국 기업들은 “개정된 투표법이 흑인 유권자를 부당하게 억압한다”며 확실한 반대 목소리를 냈다. 보통 이런 정치적 사안에는 정당이나 정치단체 등 정치꾼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다.
공정 해치는 투표법과 기업의 성명
투표법 개정의 주체는 공화당이고, 공화당이 개정을 강행한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당을 선호하는 흑인과 민주당 지지세력을 이대로 놔뒀다가는 정권을 되찾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사례만 보자. 경찰의 만행에서 비롯된 지역의 흑인 인권운동인 BLM(Black Lives Matter)은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공화당이 강세인 조지아주에서 1992년 클린턴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의 바이든이 승리했고, 올 1월 상원의원 결선투표에서도 민주당이 2석 모두 가져갔다.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이 공약대로 6조 달러의 재정지출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도 민주당이 다수파를 차지한 상원의 지지 덕분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공화당은 투표법을 교묘히 개정해서라도 ‘반공화당’ 세력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개정된 투표법의 핵심은 민주당 지지파가 많이 활용하는 우편투표를 제한해 친민주 유권자의 투표참여를 줄이고, 투표자의 신분확인을 엄격히 해 민주당 성향 흑인의 투표율을 낮추는 것이다.
친공화당적, 혹은 공정함이 왜곡된 개정안이 통과되자 조지아주에 본사가 있는 미국의 상징 코카콜라, 그리고 미국 최대항공사인 델타항공 경영자가 규탄성명을 발표한다. 그걸로 그쳤다면 기업인과 정치인들 간의 ‘잘 난 금수저끼리’ 벌이는 애정 다툼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코카콜라에 이어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인 MLB가 “조지아주에서는 올스타 게임을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일반인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고 정치 이슈가 됐다.
MLB 성명을 계기로 기업 민주주의와 스포츠 민주주의가 손을 잡았고, 경제와 스포츠가 정치 영역에 진입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지지기반은 기업, 민주당은 노조지만 이제 그런 단순 구도는 통하지 않게 됐다.
아마존‧구글‧스타벅스‧워런 버핏
공정하다고 보기 힘든 투표법 개정에 NO라고 말하는 기업은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달 14일에는 조지아주처럼 투표법 개정을 추진 중인 애리조나, 텍사스, 플로리다 등 공화당 강세 지역이 공격대상이 됐다. 기업들이 “집어 치우라”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반대 광고를 냈다. 광고에 이름을 올린 존재는 아마존, 구글, 스타벅스, 뱅크 오브 아메리카, 워런 버핏, 마이클 블룸버그 등이다.
흑인 차별은 이전부터 있던 미국 남부의 악습이다. 그런데 투표법 개정에서 시작된 갈등은 이번에는 글로벌 기업들이 참여해 목소리를 내면서 미국 남부의 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의 맹주를 자처하는 바이든 정권은 ‘인권, 공정,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 3가지가 소련 대신 라이벌로 등장한 중국을 공략하는데 최고의 무기라고 보고 있어서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바이든이 중시하는 인권 공정 민주주의를 해치는 조지아주 투표법에 대해 미국 기업들이 NO라고 하고 있다. 의도했건 안 했건 코카콜라 구글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들의 인권 공정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은 바이든의 대중국 전략과 일치하며, 기업의 정치권 내 비중을 높여주고 있다.
미국 기업의 정치적 움직임을 ‘잘 포장된’ 판매 전략으로 보는 시각도 있기는 하다. ‘법인 민주주의’의 대두에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기업은 정치에 눈길을 주기에 앞서 엄격한 윤리관부터 갖춰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과연 기업의 정치 참여가 그렇게 경계해야 할 대상일까.
선거 대신 구매로 정치 견제하는 시대
정치의 원래 주인공인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다. 선거를 가장 두려워한다. 가장 겸손해지는 때도 선거 때다. 하지만 선거법 위반 등으로 일정 형량 이상의 유죄판결을 받는 경우, 보궐선거가 치러지는 경우, 그리고 그 어렵다는 탄핵안이 통과되는 경우가 아니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정치를 혼낼 기회는 드물다. 4년 혹은 5년에 한 번 밖에 없다. 그런 현실에 많은 유권자들이 답답해하고, 때만 되면 개헌론이 나온다.
반면 기업은, 국가의 주인이자 소비자인 국민이 안 사주면 바로 고개 숙인다. 인터넷에 정확한 상품평을 올리거나, 구입 버튼을 클릭하지 않아도 바로 고개 숙인다. 4,5년이 아니라 분초 단위로 소비자가 무릎 꿇게 할 수 있는 존재다. 이렇게 국민이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정치 쪽에서 일정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국민에게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미국을 보면 기업과 정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희망적이건 두렵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부작용도 있겠지만, 기업의 정치 참여가 미국 코카콜라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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