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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신화의 변용과 해석으로 독자적인 조각세계 선보여
/예술가로 영혼을 잇고, 작업은 호부(護符) 역할 띠는 예술관 수호
/만인이 소망하는 1000가지 목각한 ‘도깨비의 꿈’은 최대 역작
/무거운 맥락조차도 익살로 승화…또다른 진중한 메시지 전달
판소리를 대중음악에 접목시킨 얼터너티브 팝밴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 한국관광공사 영상에도 소개된 바 있는 ‘범 내려온다’는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를 들을 때마다 우리의 정서와 미감이 이토록 호쾌하고 신명났던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명제를 입버릇처럼 되뇌던 게 엊그제 같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1990년대 예술계에서 ‘한국성’이라는 화두가 본격적으로 회자하기 시작했다. 물론 강력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도권을 쥔 메인스트림으로 표출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심의 해체’는 역사적 필연으로서 새로운 예술의 지평에서 ‘대한민국’의 좌표를 설정해야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작품에 스며들게 하는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개념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차원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다. 민족적 정체성은 마치 체취와 같아서 자신은 자기의 냄새를 잘 못 맡지만 타인이나 국외자가 더 예민하게 맡는 것과 같이 묘한 것이다. ‘한국적’이라는 것을 개념화시키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건조해지거나 도식화되는 경향이 짙다. 요컨대 ‘우리다움’이라는 심미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적인 차원을 자연스럽고 은연중에 드러내는 내공과 감각이 요구된다. 분석심리학의 신화, 즉 원형의 세계에 대한 접근로가 가장 보편화된 것이기는 하다. 물론 이 대목에서도 원형적인 이야기를 조형 자체의 ‘좋음’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역량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신화’를 조형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개성적 조형세계를 추구해온 작가가 있다. 바로 조각가 김성복(57)이다. 그는 1995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지금까지 15회 개인전을 가진 경력이 있다. 사실 조각으로 개인전 한번 하기가 쉽지 않다. 비용과 시간, 에너지, 소장 공간 등의 조건들이 따라줘야 가능하다. 보통 양이 많다 보면 질적으로 소홀해질 수도 있지만 그의 경우는 예외이다. 오히려 상상 이상의 에너지와 밀도,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철저히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과 양식으로 담고 있어서 그의 작업들은 지루하지가 않다.
그는 우리의 원형, 즉 신화에 대한 오랜 탐구를 토대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한마디로 방법적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는 일관된 미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점, 이는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밖에 없다. 그게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우리 원형 자체가 그렇게 고지식하거나 기계적이지도 않으며 편협하지도 않다. 우리 미의식이나 세계관은 대립적인 것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데 특화되어 있다. 즉흥적인 듯하면서도 빈틈이 없고, 대충 투박하게 하는데도 세련되다.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 속에 강인함과 날카로움이 살아 있고, 가공하지 않은 것 같지만 철두철미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 전통문화는 파고들수록 묘미와 매력을 갖는다.
이러한 우리 미감의 특징들을 통달하고 관통하고 있는 것이 작가의 작업이다. 무언가 고지식한 듯한 일관성 속에서도 얼마나 유연하고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지 알면 알수록 흥미롭다. 그는 2009년 전시에서 ‘도깨비의 꿈’을 발표했다. 1000 피스의 목각 소품들을 조각하여 한 자리에 모은 것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와 스케일을 과시한 바 있다. 하나의 형태를 캐스팅하여 1000개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제각각 다른 소재를 가지고 제작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것도 그냥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1000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갖고 싶은 것들에 대한 설문을 통해 1000개의 아이템이 정해진 것이다. 자신이 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초자연적 영매가 되어 온갖 물신들을 쏟아내는 전능적 도깨비와의 중개인을 자처한 것으로, 이야기 설정이나 전개방식을 보면 한밤중 호롱불 아래서 가슴 조이며 들었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대한 삽화적 완성판이다.
사실 조각에서 ‘도깨비’를 들고 나온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싱거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작품이라는 것은 단순히 표현이나 장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작품이 어디에 있든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상서로운 복을 빌어주는 기복이나 혹은 액운을 막아주는 벽사의 역할을 하는 호부(護符)의 기능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그에 대한 믿음은 독자의 몫이기에 어떤 관점과 이해로 접근해도 무방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기원을 진지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신화 시리즈 가운데 호랑이나 해태상 같은 작품들이 많다. 광화문의 해태상 같은 버전을 보다 익살맞고 개성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조금은 무서워 보일 수도 있는 도깨비를 매우 친근하고 익살맞은 코드로 개성화시킨다. 장난기가 많은 도깨비가 혀를 날름거리면서도 꼬리에 전가의 보도 같은 방망이를 장착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새끼 도깨비가 어미의 등에 올라타 있다. 과거 한때 유행을 탔다가 식상해져서 지금은 기피되는 모자상이 이렇게 절묘하게 각색되고 리바이벌되는 것 같아 흥미롭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예술가를 시대적 영매(靈媒), 즉 샤먼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가 비디오나 로봇을 제시한 것도 영매의 분신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김성복은 우리와 도깨비 사이를 연결해주는 영매를 자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독교 세계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환경에서 우리 고유의 미의식이 이젠 낯설게 느껴지지만, 예술가의 역할을 영매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어딘지 모르게 무거울 수도 있는 맥락조차도 작가는 익살스러운 코드로 승화하고 있다. 가벼움 속에는 또 다른 진중함이 있는 것이 ‘우리’ 혹은 ‘그’의 속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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