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진칼럼] ‘억겁’이 얼마나 길고 긴 세월인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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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에 불과한 인생 ‘억만금’을 줘도 못 산다는 걸 깨달아야

조정진 발행·편집인 기자페이지 + 입력 2021-09-28 10:20:07

우리나라 국부(國富)를 나타내는 국민순자산액이 2011년 1경원을 돌파한 이후 꾸준히 늘어 2020년 기준 1경7722조원으로 집계됐다. 올해쯤 2경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이버머니로만 통용되던 경(京)이라는 단위수가 비로소 실물 경제에 등장했다. 1경은 1조(兆)의 1만 배로 1에 0이 16개가 붙는다. 경제 단위가 커감에 따라 사람의 감각은 그만큼 무뎌지는 느낌이다. 여기에 일조를 하는 것이 수이다.

우리는 그동안 일, 십, 백, 천, 만, 억, 조까지는 흔히 써왔으나 앞으론 경도 심심치 않게 접할 것 같다. 그럼 경 다음엔 뭘까. 아이들이 물으면 해, 달, 별, 은하수, 무지개 하며 얼버무렸지만 실제로는 경 다음에도 단위수가 13개나 더 있다.

해(垓), 자(秭), 양(穰), 구(溝), 간(澗), 정(正), 재(載), 극(極), 항하사(恒河沙), 아승기(阿僧祇), 나유타(那由他),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대수(無量大數)가 그것이다. 해는 0이 20개, 정은 0이 40개, 무량대수는 0이 68개나 붙는 사실상 무한대를 나타낸다. 실생활에서 사용될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왜 인간은 이렇게 큰 단위수까지 만들어놨을까. 의미는 또 뭘까. 호기심이 꼬리를 문다.

일부터 극까지는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단위수이고, 항하사부터는 불교경전 ‘화엄경’에 나오는 용어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인도 갠지즈강의 모래를 뜻하는 항하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량’을 의미한다.

이들 단위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관성이 눈에 띈다. ‘일, 십, 백, 천’ 네 자리 수를 한 묶음으로 하여 다음 묶음이 될 때마다 새로운 단위를 붙인다는 사실이다. 즉, 억은 1만의 만 배이고, 경은 1조의 만 배 식이다. 즉, 10의 4제곱 단위로 끊어진다. 그래서 아라비아 숫자에서 세 자리마다 콤마를 찍는 우리나라 현 숫자 표기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네 자리마다 콤마를 찍으면 읽기도 편하고 이치에도 맞는다.

큰 수뿐만 아니라 작은 수도 있다. 대부분 낯설지만 일부 친숙한 수도 있다. 분(分), 이(釐), 모(毛), 사(絲), 홀(忽), 미(微), 섬(纖), 사(沙), 진(塵), 애(埃), 묘(渺), 막(漠), 모호(模糊), 준순(逡巡), 수유(須臾), 순식(瞬息), 탄지(彈指), 찰나(刹那), 육덕(六德), 허공(虛空), 청정(淸淨) 등이다. 분은 1의 10분의 1이 되는 수이고, 순식은 눈을 한 번 깜짝하거나 숨을 한 번 쉴 만한 아주 짧은 동안을, 찰나는 75분의 1초 즉 0.013초다. 가장 작은 수 청정은 10의 마이너스(－) 21승을 이른다.

억겁은 사연 있는 단위수다. 겁(劫)은 달구지로 한나절 걸리는 거리(약 14㎞)를 한 변으로 하는 정육면체 바위를 선녀가 옷자락으로 100년에 한번 씩 스쳐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니 겁이 억 개 있는 억겁은 얼마나 긴 세월인지 짐작도 안 간다. 억만금(億萬金)은 10의 9제곱으로 요즘 단위로 하면 10억원이다.

한자문화권에서 큰 수는 10의 72승인 만무량대수에서 끝나지만 서양은 구골(10의 100승), 아산키야(10의 140승), 센틸리온(10의 600승), 구골플렉스(0이 1조개), 그레이엄수(0이 100조개), 두센틸리온(10의 603승), 트레센틸리온(10의 903승)도 있으나 장난삼아 지은 것들이라 공허하다.

이 중 구골은1938년 미국 수학자 카스너의 9살 조카 밀턴 시로타가 이름 붙인 수다.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사이트 구글(Google)은 무한한 정보를 담겠다는 뜻으로 도메인을 ‘구골(googol)’로 등록하려다 이미 같은 이름의 사이트가 있어서 철자를 바꿔 구글이라고 했다는 설과 실수로 잘못 표기했다는 설이 있다.

만세·만국·만인·만전·만능·만년·만병·만일·만행 등에 두루 쓰이는 만(萬)에 주목해 보자. 만은 모두·오랜·영원을 상징하다. 이 한 글자에 인간의 온갖 재주와 욕망과 바람, 꿈이 담겨 있다. 재는 10의 44제곱이니 천재일우(千載一遇)는 10의 47제곱분의 1의 확률을 의미한다.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확률이다.

현실이 이러하니 뭇 인간은 선택해야 한다. 불가능한 만세·억세의 삶을 무한정 꿈꿀 게 아니라 생로병사가 다반사인 인생의 유한성을 인정해야 한다. 어차피 공수래공수거 아닌가. 쌀 한 톨, 지폐 한 장 가져가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손오공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듯이,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정 속에 흩어지고 만다. 수는 이렇게 한없이 교만해지려는 인간을 다잡고 있다. 그러므로 찰나 한 번뿐인 인생, 가치 있게 살아보자.

조정진 발행·편집인 skyedaily@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