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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성대결에서 예상밖 압승
여성테니스연맹 창립 위해 투쟁
여성 전용 은행 FWB 설립 주도
CNN ‘세계역사 바꾼’ 여성 꼽아
78세 고령에도 사회운동에 앞장
세계 여자 테니스의 상징적인 인물로 꼽히는 빌리 진 킹은 올해 78세지만 여전히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하고 있다. 킹은 얼마 전 메이저 테니스 대회인 US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 결승전을 관람한 뒤 시상식에서 우승자에게 영광의 트로피를 전달했다. US오픈 테니스 대회 단식 결승전은 그의 이름을 딴 미국 뉴욕의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열리는 게 관례로 돼 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여성 인권 옹호론자인 그는 지난달 24일에는 여성의 경제 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처음 문을 연 여성 전용 은행인 ‘퍼스트 위민스 뱅크’(FWB) 설립을 주도했고, 직접 투자자로 나섰다. FWB는 여성이 설립·소유·경영을 맡고 있으며, 남성들은 아예 이용할 수가 없다. 빈곤층의 70%가 여성이라는 그의 판단이다.
스포츠 집안에서 엄격한 가정교육
보수적인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난 킹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부모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아버지는 농구와 야구를, 소방관인 어머니는 수영을. 남동생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에서 12년간 투수로 활약했다. 한 마디로 운동 집안이었다. 어렸을 적 그는 5살이나 많은 언니들과 어울리며 야구와 소프트볼을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의 소프트볼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소프트볼에서 테니스로 전향을 해야 했다. 부모님이 그에게 좀 더 ‘여성다운 스포츠’를 찾아보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감히 부모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킹은 인생에서 중요한 정직과 자선 등 모든 덕목을 밥상머리에서 배웠다고 했다. 이는 킹이 살아가는데 큰 덕목으로 작용했다.
그는 롱비치의 많은 무료 공공 코트에서 제공하는 무료 레슨을 이용하여 테니스를 배웠고,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 입학했지만 졸업을 하지 못했다. 테니스에 집중하기 위해 3학년에 학교를 떠났다. 그렇지만 당시 테니스는 프로가 아닌 순수 아마추어 종목이었기 때문에 큰돈을 벌 수가 없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윔블던대회 출전
킹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처음 출전한 1961년 최고 대회인 영국의 윔블던 대회에서 카렌 한체와 콤비를 이뤄 여자 복식 타이틀을 거머쥐면서부터였다. 단식에서는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윔블던에 나가려고 했지만 그는 재정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아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그 신세는 유명 선수가 되면서 모두 갚았다. 1962년 여자 복식에서도 우승한 킹은 1963년에는 당시 세계랭킹 1위인 영국의 마가렛 코트를 꺾고 단식 챔피언에 올랐다. 그렇지만 여자 우승자 상금은 남자들에 비해 반에 반도 안 될 정도로 형편없었다. 남자선수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남자 경기는 더 스피드하고 흥미진진하며 강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킹이 테니스를 시작할 당시 테니스는 아마추어 스포츠였다. 그나마 이름난 선수라고 해야 일당이 고작 14달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가 착안한 것이 테니스의 프로화였다. 테니스가 제대로 흥행이 되려면 프로 스포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프로화가 되면 보다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더구나 테니스야말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이었고, 생업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성차별 반대론자인 킹은 남편 래리 킹 등과 더불어 테니스를 거액의 상금이 걸린 프로 스포츠로 전환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했고, 1968년 마침내 여자테니스연맹(WTA)을 창립해 남녀 차별적인 스포츠 우승 상금 제도를 알리며 차별금지 캠페인을 벌였다.
인류 역사상 첫 성대결에서 승리
킹은 12개의 그랜드 슬램 단식 타이틀과 16개의 그랜드 슬램 복식 타이틀, 그리고 11개의 그랜드 슬램 혼합 복식 타이틀을 갖고 있었지만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1973년 세기의 성대결이었다. 1972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킹은 당시 29세, 상대인 전 윔블던 챔피언 바비 릭스는 55세였다.
미국 휴스턴의 애스트로 돔에서 열린 성대결은 세계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외로 킹이 3-0으로 압승을 거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성차별 반대론자인 킹이 승리하면서 당시 만연했던 성차별과 불평등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대결은 인류 역사상 스포츠에서 최초의 남녀 대결이었다. ‘골프 여제’ 아니카 소렌스탐이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 출전해 성대결을 벌인 것보다 무려 30년이나 앞선다. 이전까지 여성은 체력이나 경기력이 남성에 비해 한참 처질 것이라는 편견에 매몰돼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성대결에서 킹의 승리를 계기로 그해 가을에 열린 메이저 대회인 US오픈 테니스 대회에서는 남·녀 부문 우승 상금이 마침내 같아지게 됐다. 이후 킹이 창립한 WTA의 노력으로 호주 오픈(2001년), 프랑스 오픈(2006년), 윔블던(2007년)이 연이어 규정을 바꿔 4대 메이저 대회의 남녀 우승상금이 모두 같아졌다. 무려 4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메이저대회에서 우승 상금은 30억원을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킹의 노력과 투쟁이 없었으면 이뤄지지 않았을 위대함을 보여준 한 단면이었다. 2015년 CNN은 킹을 케냐의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안네의 일기’를 쓴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 등과 함께 세계 역사를 바꾼 ‘여성 7인’으로 주저 없이 꼽았을 정도다.
여자 테니스 국가 대항전인 페더레이션 컵대회가 2020년 9월부터는 그의 이름을 따 빌리 진 킹 컵 대회로 명칭을 변경해 매년 열리고 있다. 킹이 테니스에서 보여준 선구자적인 역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낙태와 이혼 등 불우한 가정사
주업인 테니스 세계에서는 혁혁한 공로를 세운 킹이였지만 그의 가정사는 불우했다. 인공 임신중절 수술과 이혼, 자신의 성 정체성 커밍아웃 등을 겪어야 했다. 어렸을 적에 늘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부모로부터 귀가 따갑게 가르침을 받았던 그는 동성애 혐오자들인 부모에게 사실을 알리며 여성 전문 운동선수 가운데 최초로 커밍아웃 하는 용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테니스를 통해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에 승복하는 과정을 배웠다는 킹은 1983년 24년간 선수로 활약했던 코트에서 떠난 뒤 녹색 생활 실천, 기후변화 금지 등 사회운동에 앞장서 왔다. 여성 전용 은행 설립 등에 관여한 여전사 킹이 앞으로 또 어떠한 사회 활동을 벌일지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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