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놀이’에 모른 체 스며볼까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데스크칼럼

[스카이 View]-세상은 무대

‘세계관 놀이’에 모른 체 스며볼까

박선옥 논설실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1-10-22 00:02:52

얼마 전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가방에서 바스락 거리며 김을 꺼내놓았다. 한 봉지가 아니고 여러 개를 꺼내놓는데 포장도 이름도 낯선 ‘김갑생할머니김’이다. 양념된 김을 사놓은 지 오래돼서 오죽 먹고 싶으면 샀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가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진출해 요즘 ‘핫’하다는 새로운 브랜드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문학·영화 등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는 현실을 모방하고 비틀어 만들었는데, 이제는 현실이 상상 세계를 모방하는 시대가 됐음을 알리는 신호가 됐다.

‘김갑생할머니김’은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 등장하는 재벌 3세 캐릭터 이호창 본부장이 경영하는 기업에서 현실 세계로 내놓은 제품이다. 김 포장지에는 “양념으로 얼룩진 흰 쌀밥을 감싸줄 수 있는 건 김 한 장뿐이다”는 이 본부장의 ‘어록’도 인쇄되어 있다. 이 제품은 실제로 김을 만드는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출시 3시간 만에 첫 생산물량이 완판 됐다는 후문이다. 이는 곧 해당 유튜브 채널에서 표방하는 재벌 3세 이호창의 캐릭터 뿐 아니라 그가 경영하는 회사와 제품 등을 통해 구축된 ‘세계관 놀이’에 시청자들이 기꺼이 동참했다는 걸 보여준다.

이호창 본부장은 사실 개그맨 이창호가 연기하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른 체’ 재벌 3세 이호창이 이끌어가는 ‘세계관’에 몰입하기를 자청한다. ‘세계관’이란 본래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나 관점을 뜻하는 일종의 철학적인 용어로 쓰였으나, 최근에는 소설, 영화, 게임 등 창작물에서 현실 세계와 다른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일종의 배경 설정을 가리킨다. 예컨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세계관에는 마법과 마법사의 존재, 기숙학교, 악의 근원 등이 주요한 설정이 된다.

특히 MZ세대를 겨냥해 세계관 놀이를 이용한 이런 식의 마케팅은 사실 빙그레가 먼저 선수를 쳤다. 우리에게 익숙한 꽃게 모양의 과자 홍보를 위해 빙그레가 설정한 세계관은 러시아 굴지의 기업 게르과자 인터내셔널의 대표 게르과자 마시코프와 그가 세계를 공략하기 위해 펼치는 전략이다. 그는 K-푸드로 유명한 한국 시장을 공략하면 쉽게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전략으로 게맛 스낵 ‘끄랍칩스’를 한국에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그가 밀수혐의로 체포되고 뉴스에 보도되는 등의 디테일한 상황들이 설정된 세계관 내에서 펼쳐진다. 이 흥미로운 설정에 시청자들은 짐짓 모른 체 댓글을 달거나 해당 제품을 구매하는 식으로 세계관 놀이에 동참한다. 이때 이들이 구매하는 것은 단지 김이나 과자 뿐 아니라 제품을 둘러싼 세계관이 된다.

사람들은 거짓인 줄 알면서 왜 이런 세계관에 자신을 맡기는 것일까. 인류 문화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은 자연을 모방한 창조를 통해 생존을 모색해 왔다. 그리하여 위기 때마다 신을 향해 제의적 의식을 진행하고 그것은 연극과 문학으로 발전했다. 이런 연유로 인간에게는 허구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본능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능을 꼭 집어낸 영화가 있다. 1998년 개봉한 미국의 SF 영화‘트루먼 쇼’가 그것이다. 배우 짐 캐리가 열연한 주인공 트루먼은 ‘트루먼 쇼’라는 텔레비전 쇼의 주인공이다. 이 쇼에서는 수천대의 카메라가 동원되어 트루먼의 출생부터 자라서 어른이 되는 날까지 그의 삶이 낱낱이 방영된다. 한 사람의 일생이 시시각각 세계 각국의 시청자에게 전해진다. 다만, 주인공 트루먼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며 사실은 거대한 돔 안에 구축된 거대한 세트를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의 주변 인물들, 가족과 친구들도 모두 연출자가 배치해 놓은 배우들에 불과하다.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나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본부장이나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무대 위의 연기자이다.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연기하고 있는 배우인 셈이다. 세계적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일찍이 ‘세상은 무대’라고 설파했다. 그는 작품 ‘뜻대로 하세요’ 2막 7장에서 “온 세상이 무대이고, 사람들은 모두 배우다. 제각기 등장했다가는 사라져 버린다”고 썼다. 또 4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맥베스’에서는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자기가 등장하는 시간에는 무대 위에서 떠들어대다가 지나고 나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가련한 배우”라고 말했다.

트루먼은 자신이 연출자의 기획에 따라 무대 위에 올려진 배우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뭔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고 결국 그가 갇혀있던 거대한 돔의 한계지점으로 모험을 한 끝에 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우주의 한쪽 구석에서 지구라는 무대 위에 올려진 인간의 삶도 혹시 누군가의 기획에 의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퍼뜩 드는 대목이다. 그래서 인간이 신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MZ 세대를 중심으로 유행하는 세계관 놀이는 누군가에 의해 등떠밀려 무대 위로 올라온 배우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상의 무대 위에 뛰어든 배우들의 한바탕 놀이이다. 어차피 무대 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기왕이면 이 모든 것이 허구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체 신명하게 한판 놀아보는 것도 코로나로 인해 미래가 더욱 불확실해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박선옥 논설실장 sobahk@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