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개인이 아닌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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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View]-외교와 역사평가 신중해야

대통령은 개인이 아닌 국가다

박선옥 논설실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1-11-05 00:02:49

문재인정부 들어 외교적 결례나 실수가 여러 차례 이어지면서 국가 망신이라는 지적이 끊임없이 있어왔는데,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도 어색한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번 일의 경우 문 대통령의 언행이 실수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을 계기로 로마를 방문한 문 대통령은 이날 로마 누볼라 컨벤션 센터에서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를 만나 양자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이 인사를 나눈 후 모리슨 총리는 올해 한·호주 수교 60주년을 맞이하여 문 대통령에게 조만간 호주 방문하길 희망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후 곧 이어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들었다”면서 “이에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는 노 전 대통령 서거가 한국에서는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감사하다”며 양국 간 관계 격상과 저탄소 및 우주개발 분야 등에서의 협력이 빨리 이뤄지기를 고대한다는 답변을 이어갔다. 모리슨 총리의 노 전 대통령 애도 발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문 대통령의 이같은 태도는 외교적으로 큰 결례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모리슨 총리의 입장에서 보면 최근 한국내 사정을 보고한 보좌진들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과 함께 순간 당황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국가장을 치르고 있는 국가의 대표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현 대통령으로서 전 대통령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가 있어야 하는데 국가장을 치르는 동안 조문을 하지 않은 것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표면적으론 G20 일정을 이유로 조문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겠지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지지 세력의 표심을 의식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심된다. 만일 모리슨 총리의 애도 발언에 대한 태도 역시 그러했다면 이는 자신이 한쪽 진영만이 아닌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처사이다.

2018년 미국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대통령(아버지 부시)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당시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 4명이 나란히 한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외신을 통해 보도됐다. 정치판에서는 아웅다웅 다툼을 벌이는 사이지만 전직 대통령 장례식에서는 서로 예우를 갖춘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평소 민주당 출신인 전직 대통령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터라 그들이 함께 모인 자리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인이자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의 경쟁자 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는 선거 과정에서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을 마다 않던 사이이기 때문에 인사는커녕 서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은 것은 타계한 고인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 국가를 대표했던 사람이기에 국가와 국민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노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정부와 외교부가 저지른 외교적 결례는 또 있다. 외국 정상들이 보낸 조전을 국민과 유족에 공개하지 않은 점이다. 이에 대한 비난이 일자 외교부는 1일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 관련 조전 동향’이라는 제목으로 보도자료를 내놨다. 내용은 두 개의 문장과 덧붙인 참고사항 한 줄이 전부다. 전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우리 정부는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하여 중국, 일본, 베트남 등으로부터 조전을 접수하였다. 2021.11.1.(월) 오전까지 조전을 보내온 국가들은 아래와 같다. ◦중국, 일본, 베트남, 태국, 쿠웨이트, 바레인, 헝가리, 과테말라, 몰디브, 세이셸, 가봉 등. ※ 미국은 국무부 대변인 명의 성명 발표(10.27.). 끝.”

국가간 조전은 비밀문서가 아니다. 오히려 보낸 국가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공개해야 마땅하다. 앞서 예를 든 부시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외국 정상들이 보낸 조전의 내용들은 외신을 통해 우리 언론에도 보도된 바 있다.

이번 노 전 대통령 국가장을 치르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납득하기 어려운 일련의 행태가 모두 노 전 대통령의 공과를 의식한 것이라면 이는 역사와 죽음 앞에서 보인 오만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반면, 야권 대선 후보들의 태도는 달랐다. 윤석열 후보는 조문을 마친 뒤 고인의 ‘과’를 묻자 “장례식장인데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답했다. 또 홍준표 후보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북방정책 등의 ‘공’을 말하면서 ‘과’에 대해선 “결례이기에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모두 죽음 앞에서 삼가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29일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위 곽상언 변호사가 가족대표로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곽 변호사는 장모인 권양숙 여사의 위로를 대신 전했다. 그는 조문 후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 평가를 하셨다. 그때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통령직 업무 수행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하셨다. 그 말씀을 꼭 전해드리라고 하셔서 왔다”고 했다.

역사란 당대에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박선옥 논설실장 sobahk@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