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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을 바라본 적 있는가. 따스한 가을바람이 익은 벼를 쓰다듬고 지나가면 오색찬란한 황금물결이 넘실댄다. 도시에서는 근교로 나가야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전남 곡성의 들녘을 바라본다.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흙이 흙끼리 사귀고, 흙이 벼와 사귀고, 흙이 미생물과 곤충과 작은 동물과 사귈 때까지 시간을 주고 기다려야 한다. 흙이 논의 친구들과 우정을 쌓을 때까지 기다린 후, 사람은 제일 나중에 손을 내밀면 된다.” 김탁환 작가의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에서 나온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농부과학자 이동현 대표의 흙에 대한 태도를 묘사한 글이다.
기다림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흙과 논의 친구들이 친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여유로움을 가진 사람, 이동현 대표를 만났다. 그리고 이동현 대표의 흥미진진한 얘기에 구성진 글로 빛나게 해 준 김탁환 작가를 만났다. 황금빛 들녘에서 피아노 음악으로 만났다.
270여종의 쌀 품종을 연구하는 박사농부, 이동현 대표의 연구소 미실란에서 새로운 판이 시작됐다. 김탁환 작가는 책에서 “생산자와 요리사는 물론이고 예술가와 학자 그리고 소비자까지 모두 참여하여 배우고 익히며 즐기는 판을 만들려는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미실란과 지역 농부가 사귀고, 미실란이 만들어낸 벼의 품종의 우수성을 농부들과 공유하고, 미실란이 가지고 있는 철학 ‘상생’에 그들이 감동하기까지 15년의 기다림이었다.
예술가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미실란이 처음 생기면서부터다. 아마추어 연주자들로 시작한 미실란 음악회는 매해 열렸고 상·하반기로 열릴 때도 있었다. 그동안 클래식부터 성악, 인디밴드 음악 등 다양한 레퍼토리와 연주자들이 거쳐 갔고, 이젠 전문연주자들과 함께 하는 작은 들판 음악회가 됐다.
이번 10월 가을 음악회는 좀 더 특별했다. 이동현 대표의 입담에 매료되어 김탁환 작가의 탄탄한 시나리오로 재탄생한 창작 판소리 한마당으로 진행되었다. 미실란의 잔디마당에서 무대에 올라온 두 편의 판소리는 모두 미실란과 섬진강에서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구성됐다. 발이 탈을 쓰고 하는 발탈극도 아주 참신했다.
판소리 공연 사이에 있었던 피아노 음악이 함께하는 토크 콘서트는 두 분의 감칠 맛 나는 이야기에 색다른 향신료를 얹은 느낌이었다. 판소리와 피아노, 우리 음악과 서양음악, 도시소설가와 농부과학자. 완벽하게 서로 다른 조합이 만든 새로운 콘텐츠였다. 150여명의 관객이 함께 해 주었고 70% 이상이 도시, 특히 서울·경기 지역에서 왔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나, 황진이’, 영화 ‘조선명탐정’ 등의 원작자로 너무나 잘 알려진 김탁환 작가의 창작 판소리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가을 저녁 들녘’이라는 공간이 주는 여유로움은 몇 초의 망설임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미실란은 원래 폐교였다. 폐교가 되기 전 아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이 지금은 너른 잔디마당이 되었다. 들녘을 이웃으로 둔 잔디마당에는 우아하게 휘어진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 미실란과 함께 했던 개, 복실이, 미실이가 묻혀 있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농사는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흙과 논의 친구들이 주는 기다림이 선물로 다가올 줄 몰랐다. 몇 달 전 모내기를 체험하면서 땡볕에서 줄을 맞추어 심었던 벼들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벼가 바람에 일렁이듯 피아노 연주도 사람들의 마음을 일렁여 주길 바랐다. 김탁환 작가와 이동현 대표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일렁였듯 음악 이야기도 사람들의 마음을 일렁이길 바랐다. 바람(바라는 것)은 바람을 타고 황금빛이 되었다. 황금빛을 전하고 싶다. 글로 음악으로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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