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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된 ‘전북함’은 왜구 제압을 기념한 명칭
/고려 멸망 초래하고 중국 몰락에도 큰 영향
/절치부심 중국은 해군 강화로 서해까지 넘봐
/승리 감격보다 동아시아 해양 격돌에 대비를
최근 해군 전북함이 해체식을 가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나라 안보를 위해 6.25전쟁 때부터 활약한 군함이 1999년 퇴역한 뒤 강릉에서 일반 공개되다가 고철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이 함정에 ‘전북함’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사연이 눈길을 끈다. 고려시대인 14세기 말 전라북도 금강 하구에서 왜구들을 물리친 ‘진포대첩’을 기념하는 이름이었다.
1380년 8월 왜구들이 대규모로 침입했다. 현재의 군산과 장항 사이의 바다를 통해서였다. ‘진포대첩’에서 진포(鎭浦)는 장항 쪽에 있던 포구로 추정된다. ‘고려사’에는 그때의 전투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다.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에 들어와 굵은 밧줄로 서로를 얽어매어 놓고 일부 병력으로 그것을 수비하면서 드디어 상륙한 뒤 분산하여 각 주(州) 군(郡)으로 들어가 방화 약탈했다. 이때 나세 심덕부 등이 진포에 이르러 화포로 선박들에 불을 지르니 배를 지키던 적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거의 전멸했다.’(고려사 권126, 열전39)
정박을 위해 서로 묶여 있던 배들을 화포로 공격했으니 큰 불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왜구들이 타고 온 대규모 선단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통쾌했던 전투 장면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포대첩’의 쾌승은 당시 상황의 일부만 보여줄 뿐이다. 이때의 왜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규모 도적떼’가 아니었다. 수 천 명의 전문적인 군사집단이었다.
이미 상륙한 왜구의 주력 부대는 한 달 이상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곳곳을 누비며 한반도 남부를 유린했다. 왜구는 시기별로 ‘14세기 왜구’와 ‘16세기 왜구’로 크게 나뉘는데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는 의미다. 진포대첩이 있었던 ‘14세기 왜구’ 때는 1350년부터 40년 동안 왜구 침입이 총 591회에 이르렀다. 끔찍한 재앙이 1년 평균 15회씩 거듭된 셈이다.
왜구는 한반도에만 출몰했던 게 아니었다. ‘16세기 왜구’ 때는 중국 항저우에 상륙해 중국 내부를 이리저리 헤집다가 급기야 명나라 초기 수도인 난징까지 진격하는 일이 벌어져 중국 사회를 경악케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왜구의 ‘나비 효과’다. 왜구 침입으로 역사의 큰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은 왜구에 맞서 해안 지역의 백성들을 내륙으로 30,40리 들어간 곳으로 이주시켰다. 적들의 식량과 물자의 현지 수급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책의 치명적 단점은 농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데 있었다. 한국의 경작지들은 대개 해변 쪽에 위치해 있는데 백성들이 내륙으로 옮겨가면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록을 보자. ‘고려 말년에 왜구가 더 성(盛)하여 연해 수 천리 지역에는 인가(人家)에서 나는 연기도 끊어지게 됐다.’(세종실록 권101) 많은 백성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면서 민심은 날로 흉흉해지고 고려 사회는 재정 궁핍과 행정 마비에 시달렸다. 반면에 국방을 책임 진 군인들의 위세는 커졌다. 그 종착점은 고려의 멸망이자 ‘이성계 조선’의 등장이었다.
중국에서 왜구가 미친 파급력은 왕조교체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중국이 서구 세력에 침탈당하게 되는 계기로 흔히 명나라의 해금(海禁) 정책을 꼽는다. ‘바다에 작은 조각배도 띄우지 말라’는 정책이 중국의 해양 포기를 낳았고, 이로 인해 자체 해군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서양 세력의 침략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큰 의문이 여기서 싹튼다.
명나라 초기인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이어진 ‘정화 원정대’의 눈부신 활약상은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양대국이었음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명나라 영락제는 정화라는 신하를 앞세워 7차례에 걸쳐 함대를 멀리 아프리카까지 보낸다. 한번 항해 때 참가한 인원은 무려 2만7000명, 함선 숫자는 60척에 달했다. 같은 시기 서양 함선들은 지중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명나라는 돌연 해금에 나섰고 명나라에 이은 청나라도 같은 노선을 유지한다.
16세기 말 중국에 왔던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이 수수께끼에 대해 “바다와 해안을 침범하는 해적에 대한 두려움이 중국인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아예 바다를 통한 인적 물적 이동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왜구는 해금 정책의 이유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이후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 일찍 해군을 양성한 일본과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연속 패배하면서 ‘천하의 중심’ 중국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중국이 해양 대국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면 세계사는 물론 우리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왜구의 사례는 동아시아 지역이 민감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이는 ‘흘러간 역사’에 그치지 않는다.
‘시진핑 중국’의 핵심 전략이 ‘일대일로(一帶一路)’다. 세계를 중국 중심의 판도로 짜겠다는 신(新)실크로드 구상이다. 이 가운데 ‘일로’는 해상 실크로드, 즉 명나라 정화의 대(大)항해 코스를 재현하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600년 전의 정화라는 인물을 거론한다. ‘중화제국 부흥’을 노리는 역사의 소환이다.
한번 크게 당했던 것에 복수의 칼을 갈면 집착도, 탐욕도 커지는 법일까. 중국은 세계 물류의 주요 루트인 남중국해를 장악하기 위해 주변 국가는 물론 미국 영국 등 서방과도 정면 대결을 불사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구호로 대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유도 결국 중국 앞바다를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우리 서해도 이들의 먹잇감이 됐다. 중국의 북해함대가 서해 바다를 내해(內海)화 하려고 작심하고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우리 정부와 해군은 속수무책이다. 최근 중국 해군의 전함 수(360척)가 미국(297척)을 넘어섰다는 보도도 있었다. 해군력 강화에 필사적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일본의 해군력은 또 어떤가. 세계 2위 자리를 놓고 중국과 다투는 수준이다.
해군 함정 전북함을 통해 자랑스러운 왜구 격파의 감격만 떠올리면 안 된다. 해양 패권을 놓고 전환기적 격돌이 벌어지는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어떻게 맞서야 할지 모색하는 일이 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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