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농구가 국제무대에서 가장 명성을 날린 것은 1984년 미국 LA올림픽 때였다. 이후 무려 9번의 올림픽을 치렀지만 한국 여자농구는 LA올림픽에서의 은메달을 뛰어넘는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구기 종목 최초의 올림픽 은메달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농구는 프로 출범 이전이였지만 겨울 스포츠로서 큰 인기를 차지했다.

 

한국은 올림픽 예선에서 당시 중공에 참패를 당하면서 올림픽 본선 진출이 좌절됐으나 동구권 국가들이 대거 불참하는 바람에 출전권을 획득하는 행운을 거머쥐었고, 급기야는 대한민국 올림픽 출전사에 새로운 역사를 쓰는 금자탑을 쌓게 되었다. 여자농구는 올림픽 무대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쾌거를 이뤄내 인기몰이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1980년대 농구대잔치 시절의 한국 여자농구 전성기는 이제 머나먼 나라 이야기만 같이 요원하게 느껴질 뿐이다.

 

LA올림픽 은메달은 걸출한 스타 플레이어인 박찬숙, 여고생 성정아 등이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거인 센터 김영희, 민완가드 박양계 등 멤버가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꽃다운 24살, 병마에 잡혀 은퇴

 

당시 멤버들은 은퇴 후에도 농구 지도자로서의 삶을 보냈지만 2m5의 거인 센터인 김영희는 30년 넘게 외로이 투병생활을 해오고 있어 무척 안쓰럽다. 김영희가 속칭 거인병이라는 ‘말단비대증’ 판정을 받은 건 지금부터 34년 전인 1987년이다. 눈물겨운 투병생활을 해오고 있는 그는 결혼도 물론 하지 않았다. 뒷바라지를 해주던 엄마가 1998년, 아버지가 세 차례의 암수술 끝에 2000년 세상을 뜨면서 너무 막막한 탓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김영희가 앓는 말단비대증은 성장호르몬의 과잉 분비로 인해 생기는 병이다. 뼈 성장으로 손발과 안면 등은 물론 혀와 같은 연부 조직도 커진다. 김영희는 거인병과 함께 당뇨, 우울증 증세까지 보이는 등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주변의 놀림과 우울증 때문에 3~4년 동안 집 밖을 아예 안 나가기도 했다. 우울증세가 심할 때는 바깥 날씨가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데도 난방을 아예 안 틀고 문을 열어놓은 채 울었다고도 했다.

 

팔 쭉 뻗으면 림에 닿는 ‘코끼리’ 센터

 

울산에서 태어난 김영희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큰 덕분에 부산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배구 선수로 운동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농구로 종목을 바꾸었고, 동주여자중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장신의 유망주로 주목 받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 끝에 농구 명문인 서울의 숭의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숭의여고를 졸업한 뒤에는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입단했다. 숭의여고 2학년 때 여자농구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됐으며, 은퇴할 때까지 대표 선수로 줄곧 활동했다. 체격이 커 ‘코끼리’라는 별명이 붙은 김영희는 키가 워낙 커서 팔을 쭉 펴고 발뒤꿈치만 살짝 들면 3m5 높이의 농구 림에 닿을 정도였다. 그는 당시 농구대잔치에서 한 경기에 52점을 기록, 여자농구 한 경기 역대 최다 득점을 기록했고, 75 리바운드를 기록, 한 경기 역대 최다 리바운드 기록을 세우는 등 그의 전성기는 1980년대 중후반까지였다. 1983~84년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우승을 확정지으며 단신의 박양계가 거인 김영희에게 매달려 마치 거꾸리와 장다리를 보는 듯 했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영희는 득점, 리바운드 등 5개 부문에서 1위와 함께 MVP를 거머쥐었다. 그는 국내 무대에서는 업계 라이벌인 태평양화학의 1m90 장신 센터로 4년 선배인 박찬숙과의 라이벌 대결로 눈길을 모았으나 국제 대회에서는 느린 스피드 등 몇 가지 단점 때문에 주전으로 많이 뛰지는 못했다.

 

훈련 도중 반신마비와 실명 위기

 

거구의 몸을 이끌고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김영희가 위기를 맞은 것은 1986년 서울아시안 게임을 뛰고 나서인 1987년 11월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24살로 한참 코트를 누빌 때였다. 훈련 도중 반신마비가 오고 눈이 안 보였다. 이전에도 몸이 불어 소속팀 한국화장품 코칭스태프로부터 올림픽에 가서 좋은 걸 많이 먹어 살이 쪘느냐는 우스갯소리를 들었지만 그대로 무시했던 그였다. 진통제만 하루 15알 이상 먹고 버티며 운동을 계속했다. 운동을 계속해야 겠다는 욕심과 병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LA올림픽 은메달 등 한국 여자농구 발전에 이바지한 점을 높이 평가해 2003년부터 그를 경기위원에 위촉해 병원비 일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함께 피 땀 흘리며 은메달을 만들어낸 LA올림픽 여자농구 대표선수들도 병상에 누워있던 그에게 십시일반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불치의 거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좋은 소식이 아닌 만큼 농구인에게는 알음알음 알려졌고, 2009년 2월 KBS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을 통해 그의 사연이 상세히 방송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부산의 8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홀로 거주하고 있는 그의 생활은 여전히 힘들 수밖에 없다. 김영희는 LA올림픽 은메달 덕분에 받게 된 체육연금 70만원으로 한 달을 연명해야 하는 형편이다. 이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수입원이다. 어떤 때는 보름도 안 지났는데 7000원밖에 안 남을 때도 있어 힘들었다고 최근 유투브 채널 ‘근황 올림픽’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민 허재, 서장훈 등 농구계 인사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세상과 단절한 채 두문불출하며 지냈던 그가 SNS를 통해 외부에 창문을 열고 소통한 셈이다.

 

장애아동 봉사로 용기와 자신감 얻어

 

우울증과 불안증에 시달리던 그런 그가 아픈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집 근처 시설에서의 장애인 봉사였다. 어린 꼬마들이 기어서 무릎 위에 올라와 ‘과자, 과자’ 할 때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고 했다. 그가 겪는 아픔과 우울증은 장애 어린이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애인 봉사를 통해 큰 용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그다. 비록 자신의 심신은 병들어 있지만 낮은 곳으로 임한 결과 정신적인 아픔을 덜어냈다는 것이다. 그가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 만큼 육체도 보다 강건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영희는 비록 오래 동안 병을 앓고 있지만 올림픽 무대를 누빈 여전사다. 젊은 시절 코트에서 보여줬던 투지와 강인함을 재연해 건강한 몸으로 팬들 앞에 다시 설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