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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표석’ 수장고 집어넣는 反문화
정권 교체 후 편향 전시회로 신뢰 추락
정치적 외풍, 좌파사관 막을 여건 안 돼
‘역사 전쟁터’ 한국에선 분열만 부를 뿐
서울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다녀왔다. 박물관 앞에 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필 표석은 소문대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 전 대통령은 이 박물관을 만든 사람이다. 취임 첫해인 2008년 광복절에 현대사박물관을 짓겠다고 밝혔고 퇴임 직전인 2012년 12월에 개관했다.
박물관 측은 ‘관람객 증가에 따른 안전상의 문제’로 2019년 2월에 박물관 수장고로 치웠다고 밝혔다. 가로 90cm, 세로 50cm 크기의 작은 표석 하나가 관람객 안전을 어떻게 해친다는 말인가. 너무도 허무맹랑한 구실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현 집권세력의 깊은 반감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중에라도 정확한 경위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박물관의 표석은 그 자체로 역사다. ‘역사박물관’이라는 간판 아래 일하고 있는 박물관 직원들이 스스로 없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정도의 상식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혹시라도 표석이 보기 싫어도, 없애고 싶은 충동이 들어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국가의 문화적 역량이자 포용력이다. K-문화로 떠들썩한 시대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이 나라 대표 거리인 광화문 한 복판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이 박물관은 대한민국의 ‘성공의 역사’를 알리겠다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구체적인 장소로 과거 필리핀 사람들이 건설해준 구 문화부 청사를 활용하겠다는 등 이명박정부 사람들이 사업을 서두르고 있을 때 너무 순진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대한민국 역사를 성공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패의 역사’로 보고 속으로 칼을 갈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만약 정권이 바뀌면 이 박물관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파 정권을 두 번 거친 뒤 2017년 좌파 정권이 들어섰고 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역사 정치’부터 나섰다. 위안부 협상, 국정 한국사교과서 등이 블랙리스트 맨 앞에 올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손보기’도 당연히 그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임기가 남아 있던 박물관장을 내보낸 뒤 그 자리에 온 새 관장은 좌편향 역사교과서 집필로 자주 뉴스에 오르내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대통령선거 때 SNS에 ‘문재인을 지지하는 이유’ ‘박근혜를 반대하는 이유’를 올리기도 했다. 꼭 이런 분을 이 자리에 앉혀야 하는가. 어느 한쪽에 기울어 있지 않고 널리 존경받는 분을 모시면 좀 안 되는가. 이후 이 박물관은 ‘화장’을 싹 고치고 대중 앞에 나타났다.
2018년 4월 이 박물관에서 개최된 제주 4.3 70주년 특별전은 ‘세상이 바뀐 걸 확실히 알게 해준’ 전시회였다. 전시장 곳곳에는 제주 남로당의 무장폭동을 ‘항쟁’으로 치켜세우는 한편, 폭동 진압에 나선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탄압’으로 규정하려는 방향성이 뚜렷했다. 당시 상황이 이처럼 선(善)과 악(惡)의 이분법 구도로 이뤄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균형 감각조차 없었다.
같은 해 12월에 ‘전쟁 포로, 평화를 말하다’ 전시회는 뜬금없이 ‘(6.25 전쟁 때) 북한 포로수용소의 국군 포로 대부분은 모국으로 귀환했다’는 설명문을 내걸었다. 6.25 때 북한에 잡혀간 국군 포로가 12만명, 그 중에서 남한으로 돌아온 국군은 8000여명에 불과했다는 통계는 익히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생존 국군 포로는 물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들이나 아버지를 둔 가족들의 피맺힌 한이 아직도 ‘분노의 포도’처럼 생생히 맺혀 있는 상태다.
다른 전시물들이 제대로 꾸며져 있으면 그나마 ‘단순 실수’로 볼 여지도 있겠지만 ‘유엔군이 자유민주주의 이념 교육을 위해 북한군 포로들에게 ‘도라지 타령’ ‘천안삼거리’ 등 음악을 틀었다’는 외눈박이 설명문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됐다.
이 박물관의 전시 운영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해 6.25전쟁 70주년 특별전에는 북한의 침략 사실을 명시하지 않고 ‘전쟁이 발발했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좌파의 편향적 역사관이 또 재현됐다. 어디서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고, 박물관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다.
대한민국의 긍정적이고 자랑스러운 역사만 전시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박물관 본연의 기능은 실제 학술적 연구를 통해 검증을 거친 결과물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런 만큼 관람객들은 박물관 전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살아 있는 현대사를 다루는 박물관은 이 점에서 운신이 쉽지 않은 만큼 더욱 전문적이고 철저한 운영 능력이 필요하다. 정치적 외풍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갖춰야 한다. 한국은 과연 그만한 여건을 확보하고 있는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 박물관 건립을 서두른 것은 사실이다. 처음부터 좌파 역사학계의 반대에 부딪힌 데다, 대한민국의 기점을 1919년 임시정부 탄생으로 하느냐 1948년 정부 출범으로 잡느냐를 놓고 다시 갈등이 이어졌다. 비판적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임기 내 개관을 밀어붙였다.
이 박물관과 비교되는 해외 사례가 독일의 현대사박물관인 ‘역사의 집’이다. 이 박물관은 1982년 당시 헬무트 콜 총리가 처음 제안한 이후 실제 문을 열기까지 12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다. 한국은 고작 4년여 만에 제안부터 개관까지 이뤄졌다. 내부 사정도 많이 달랐다. 1994년 역사의 집 개관 때 독일은 서독 주도의 통일(1990년)을 이미 달성한 상태여서 역사 해석에서 충돌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남한 내에서도 큰 차이가 있는데다 분단 상태 역시 지속되고 있다.
현 집권세력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위기 탈출의 방편으로 ‘친일파’ 공세를 펼 만큼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다. 좌파 세력은 앞으로도 ‘역사 정치’에서 결코 손을 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 현대사박물관은 국민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는커녕, 분열과 갈등의 불씨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명박 표석이 박물관 수장고를 들어가고 나오는 꼴사나운 일이 반복될 것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아직은 안 만드는 것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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