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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재해 피난처인 집의 개념을 뒤흔드는 지진
신의 노여움, 경고 등 문화사적 해석으로 존재
땅과 집, 죽음-삶 관련 우리 일상 공간을 이야기
지진기록으로 도시의 다양한 시각 읽을 수 있어
제주에 최대 진도 5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밀라노에서 난생 처음 지진을 경험했던 10여년 전 그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5층에 위치한 방안에서 홀로 잠을 자고 있던 밤, 내 몸을 세차게 흔들어 깨운 건 사람이 아닌 땅이었다. 이후 지속된 여진에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편안한 공간이 돼야 할 집은 낯설고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100여년 만에 이탈리아 북부 도시까지 찾아온 지진은 그 이후 몇 번의 여진과 함께 땅과 삶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거센 바람은 창문을 닫고 답답한 더위는 문은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면 된다. 습기가 가득하거나 건조한 환경이라면 그 자연적인 요소와 공존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으로 집을 지으며 살아갈 수 있다. 불쾌함과 두려움의 대상인 자연은 건축, 즉 집이라는 피난처(shelter)를 통해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케 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적당한 여닫음을 조절해 거리감을 조성할 수 있지만 땅이 흔들리는 것은 완전 다른 문제였다. 피난처였던 집은 위험의 공간으로 변화한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온다면,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의 위협을 받는 상황과 유사하다.
지진에 익숙하지 않은 롬바르디아 주 출신의 친구들 대부분이 나와 같이 집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학교 근처에 위치한 주유소가 무서운 존재로 거듭나고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비상 대피도를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지진에 대한 루머들이 퍼져나가 불면증을 호소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중부 출신 사람들은 여진에 담담해 하며 오히려 다른 반응을 보였다. 진도 2~3의 지진은 그쪽 지역에서는 매우 잦은 편이라 그들은 밀라노의 여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친구는 대부분이 석조인 이탈리아의 오래된 건물은 큰 지진이 날 경우, 사람이 대피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붕괴해 버린다는 더 위험한 정보를 전했다. 그리고 만약 건물의 붕괴로 사람이 죽는다면 그것 또한 운명이라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덤덤하게 말하는 상황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나 지진을 자주 경험하는 이탈리아 중부 사람들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가능성이 항상 곁에 있다고 받아들였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과 함께 살고 있다는 심오한 이야기도 들렸다.땅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예측 불가능한 땅의 변화를 일상 안에서 수용하고 사는 태도, 혹은 그만큼 자연에 대한 융통성 있는 자세는 결국 사회에 축적된 경험이 근간이 되고 있다.
지진과 관련해 2년 전 이탈리아에서 흥미로운 책 한 권이 출판되었다. ‘지진의 문화사-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고대에서 오늘날까지(Storia culturale del terremoto: Dal mondo antico a oggi)’라는 이 책은 지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지진이 만들어낸 삶의 변화를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서 다룬다. 역사학자이자 지진학자인 저자 엠마누엘레 귀도보니(Emanuele Guidoboni)는 지진은 우리가 사는 땅과 맺은 신뢰 협약이 예측하지 못한 순간 갑자기 깨지는 현상으로 묘사하며 과학적 분석이 아닌 일상의 하나로 지진을 바라본다. 땅과 사람의 공명 또는 신이 인간에게 전하는 경고의 매개체로써, 하나의 자연현상인 지진은 단순한 분석의 대상이 아닌 땅과 집, 나아가 죽음과 삶과 관련된 우리의 일상 공간을 이야기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진을 인간에게 화난 신, 포세이돈의 복수라고 여겼다. 로마인들 또한 지진을 신들과 인간 사이 언약의 징표처럼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진이 만들어내는 사람 내부의 엄청난 변화를 바탕으로 지진을 인체에 의해 생성되는 진동 중 하나라고 간주했다. 반면, 중세 기독교인들은 지진을 세상의 악에 대한 명백한 비난의 신호로써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여겼다. 인간의 죄에 대한 개념이 공고해지며 지진은 자연적 현상보다는 인류를 벌하기 위한 징조로만 다뤄졌다.
1117년 이탈리아의 대지진을 묘사한 판화를 살펴보며 당대 사람들의 생각을 유추해본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었던 당대 건축물은 이탈리아 중부 친구의 말처럼 지진이 일어나면 건축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 속 건축물은 기울어지거나 반으로 꺾여있을 뿐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무너진 건축물보다 땅의 뒤틀림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들의 일상이 유지되는 도시가 있었음을 온전한 건축물로써 기억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소망이 그림에 투영된 것이라 해석된다.
지진의 원리를 이해하고 지진에 대응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지진학과 지질학 내에서 지진의 구조적 특성 파악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과학 시간에 지진을 배우고 이해하게 된 지 100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진은 이제 예측하고 대응해야 하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전히 지진의 이전과 이후 일상의 모습은 변화한다. 두려움, 걱정 혹은 잘 대응했다는 안도감 등등 다양한 감정이 일상이 공간에 다시 의미를 부여해나간다. 집의 모양새뿐만 아니라 집에 대한 감정, 생각이 함께 기록되는 21세기 지진과 도시의 이미지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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