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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스포츠에서만이 아니라 예술에서도 힘 빼는 것이 필수라고들 말한다. 근육들이 경직된 상태에서는 신체의 에너지를 모아 임팩트까지 전달하기가 쉽지 않음을 특히 골프에서 많이 느낄 수 있다. 물론 힘을 빼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예술창작에서도 담론이나 관념적인 부분을 조금만 이완시켜주면, 훨씬 기발하고 감각적이며 대중과의 소통 또한 원활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예술에서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만으로 좋은 작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직관과 개념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요소지만, 예술의 중요한 근간으로서 조화시켜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다양한 요소들을 두루 조화시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것으로, 작가의 중요한 역량이자 자질의 척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해 12월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된 적이 있었던 ‘국제조각페스타’에서 특이한 작가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조각가 위세복. 사실 그는 조각가라기보다는 화가에 더 가까운 작업을 선보이고 있었다. 두 가지 유형의 평면 작업으로서, 하나는 가는 동선(銅線)을 이용한 드로잉 작업이며, 또 하나는 바느질을 응용한 작업이다. 무겁고 양감이 강조되는 조각가에게서 회화적 감각이 넘치는 양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은 신선하고도 경이로운 일이다.
원래 작가는 스텐레스 스틸을 이용해 전형적인 추상적이고 기하적인 조형작업을 해왔다. 구체인 듯, 아닌 듯한 구조를 프랙털, 즉 불규칙적이고도 비정형적이면서 모종의 규칙성을 보이는 모듈의 조합이 두드러지는 작업이 그것이다. 특히 극한의 연마를 통해 거울 효과를 ‘관계적 투사’라는 컨셉트로 집약시킨 ‘나르시스의 연못’ 연작이나, 혹은 나무와 금속을 결합한 작업들을 통해 조각적 구조에 집중해 온 작가의 오랜 작업에서 벗어나 새롭게 선보인 신작들은 힘을 뺀 결과물들이다.
조형적 발명이라면 발명이라 할 수 있는 전자의 금속선 드로잉을 먼저 보자. 작가의 작업이 공공미술 작품으로 선보인 사례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박수근미술관 초입에 타원 구조의 초상 작품이 있다. 앞뒤 양면에 박수근의 모습이 재현된 펜화 같은 드로잉 작업이 약 3m 크기로 세워져 있는데, 바로 위세복 작가의 것이다. 무관심으로 지나가면서 보면 박수근의 사진을 타원 구조물에 전사 방식으로 재현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마치 수예틀처럼 생긴 타원 구조에 가는 철사들이 끝에서 끝으로 연결되어 선묘를 이루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구현하게 된다. 우리 동시대의 미적 성향이 재현에 대해 인색한 편이지만, 참신한 방식의 재현은 폭넓은 지지와 공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탄탄하게 닦여진 데생의 기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조각계에서는 보기 드문 기발하고 참신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작가는 이러한 참신한 작업을 선보인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새로운 방식의 드로잉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전자의 금속선 드로잉이 긴 선묘라면 후자는 지극히 짧은 선묘, 즉 스티치 방법을 차용한 바느질 시리즈이다. 전시장에서 작품들을 자세히 음미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쳤겠지만, 눈썰미 있는 사람들은 스쳐 지나치다 뭔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고서는 다시 뒷걸음을 치곤 한다. 평범하고 가볍게 만들어진 작업이지만, 뭔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서 앞걸음, 뒷걸음을 하며 신기한 듯 관찰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작가의 스티치 작업 유형은 한땀 한땀 실제 바느질을 해서 제작된다. 흔히 천에 하는 것과 다른 점이라면 검정 금속판에 철사로 하는 것이지만, 바느질이 그대로 응용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스티치의 간격과 돌출로써 화면의 픽셀을 조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 길이와 간격의 변화가 치밀하게 조율되어 모종의 일루전이 출현하게 되는데, 그 현현의 방식이 은유적이고 신비적인 아우라를 띤다. 규칙성 속에 미세한 불규칙성을 치밀하게 조율하여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이전의 금속선 드로잉보다 더욱 일루전을 해체하거나 최소 단위체로 환원시킨 것이다. 극한의 미니멀리즘 속에서 미세한 변화에 의해 드러나는 일루전이야말로 아날로그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시켜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각가로서 매스와 볼륨을 중시하는 것이 일반적이거늘, 규방에서 추구하던 스티치에서 영감을 얻어 그 방법을 차용, 조각 재료로 구현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가벼움과 사소함을 조각에 도입, 입체와 평면의 경계와 틈새에서 조형의 밀도와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방법의 차용을 넘어 절묘하고 진기한 조형 감각으로의 업그레이드는 아직 아날로그 영역에서도 도전하고 발굴해낼 여지가 있는 미학적 자원들이 무궁무진함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작가는 조각을 전공하기 전 건축학을 전공했다가 중도에 포기한 이력이 있다. 그의 이력서를 보면 건축 전공과 조각 전공 사이엔 오랜 공백기가 있었던 점도 발견된다. 모르긴 해도 그 행간에 다양한 삶의 체험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작가가 이토록 다양한 조형의 세계를 창출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공백기와 다양한 활동들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전의 작품들은 상당한 개념의 무게가 느껴졌는데, 어느 순간 전향적으로 힘을 빼면서 가슴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작업을 인상적으로 창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부언하자면 그의 ‘손’은 참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성의 전모와 아우라를 꼼꼼하게 빚어내는 이상적인 도구라는 점이다. 흡사 마술사의 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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