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흥망성쇠와 함께 재편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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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이의 도시인문학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석유비축기지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주유소에서 충전소로 공간변화 이어져
에너지원과 밀접한 일상의 시공간을 함께 관찰해보아야

유영이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3-16 09:50:36

연일 유가가 상승세를 지속하는 가운데, 주유소를 방문할 때마다 숫자에 놀라기 일쑤다. 운전하며 라디오로 유가 상승 소식을 듣는 것과 달리 주유소에서의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조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셀프 주유소나 알뜰 주유소를 찾는다. 주유소는 단순히 기름을 넣는 곳을 넘어 국제 석유 시장의 상황을 한 개인이 마주하는 시대적 장소로 작용한다.

석유와 연계된 장소를 연상하니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문화비축기지의 옛 이름이 떠오른다. 석유비축기지는 1970년대 초반 1차 석유파동 이후 또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석유를 저장해 두기 위해 조성됐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폐쇄된 석유저장소를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며 문화비축기지라는 독특한 이름이 부여되었다. 공원의 형태인 이곳은 석유 저장 탱크 다섯 동을 활용해 전시관, 공연장, 카페 등 문화시설을 설치했다.

공원 한쪽에는 석유가 없어질 상황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중요한 시설로 간주했던 석유비축기지에서는 외부인 침입을 가정해 갖가지 모의훈련이 행해졌다. 석유에 한없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생활과 당시의 위기감, 그에 대한 대책 등 시대의 복합적인 맥락이 어우러진 흥미로운 장소이다. 이제 문화비축기지에서는 독특한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예술적 시도가 더해지고 있다. 오랜 시간 닫혀있던 금지의 공간은 주말마다 많은 이들이 가족과 함께 나들이하는 일상의 영역이 되었다.

▲ 석유가 없어질 ’만약‘을 위한 공간은 현재 시민들의 문화 향유를 위한 시간과 공간으로 활용된다. ©서울시

시대가 석유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의 일상이 변화한다. ‘만땅’이라며 주유원에게 연료를 가득 채워달라는 외침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한자어 ‘만(滿)‘과 영어 ’탱크(tank)’가 합쳐진 이 국적 불문의 단어는 주유소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었지만 셀프 주유소가 늘어나며 이제는 잘 들리지 않는다. 사람의 목소리보다 주유기의 기계 목소리가 안내를 대신한다. 모니터에 나타나는 안내에 따라 작업을 수행하고 노즐 꽂기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국가마다 주유소를 칭하는 단어는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기름을 넣는 장소라는 주유소(注油所)나 가스스테이션(Gas Station)처럼 공통적으로 기름을 의미하는 단어나 기름을 ‘채우는 행태와 장소'라는 뜻이 동사 Fuel, Fill 등으로 포함된다. 그러나 주유소를 더 이상 주유소로 부를 수 없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자동차의 연료가 기름이 아닌 전기가 되는 세상에서는 주유소 대신 충전소가 쓰일 것이다. 주유소의 최적 위치는 좋은 대로변이나 사거리 모퉁이였지만 전기자동차 충전소의 시대에는 이러한 입지 조건 또한 달라지고 있다. 집 지하주차장에서 충전하는 이른바 '집밥'이 있거나 대형 시설이나 공공 기관 위주로 전기차 충전기가 설치되어 있다.

주유와 관련한 변화는 기존 주유소의 새로운 기능을 더하는 진화와 사라지는 주유소를 활용한 다양한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한 기업은 주유, 세차, 정비 공간에서 전기차 충전, 수소차 충전, 카셰어링 등 모빌리티 플랫폼으로서 거듭나기 위한 미래형 주유소를 선보였다. 물류 거점, 드론 배송, 편의점과 F&B 등 충전이나 환승을 위해 멈추는 시간 동안 모빌리티와 라이프 서비스 콘텐츠로 고객을 매료시킨다는 전략이다.

▲ The Cineroleum, 영국 런던에 위치한 기존 주유소 캐노피를 활용하여 영화관을 조경하여 지역 주민을 위한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Assemble

해외에서는 오래된 주유소를 개조하여 레스토랑이나 영화관 등 지역 문화시설로 활용한 사례가 존재한다. 주유소의 특징적인 구조인 거대한 지붕과 같은 캐노피 구조를 활용한 결과다. 자동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동선이 이미 존재하고 상업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주유소의 입지를 활용하여 드라이브 스루(Drive-thru)형 카페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와이너리는 기름과 와인이 액체라는 공통점에 주목했다. 주유소의 레트로한 분위기와 주유기 자체를 아이콘으로 활용하여 흥미로운 공간 마케팅을 선보인다. 기름을 넣는 공간, 잠깐 지나치는 장소로 여겨졌던 주유소가 산업과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다양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주유소에 들르는 평균 시간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전기자동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충전을 위한 시간을 주행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매우 예민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주유소에서의 시간을 그만큼 특별히 고려된 적이 없을 것이다. 주유소는 우리 일상에서 잠깐을 점유하는 공간이었지만 충전소는 시간을 염두에 둬야 하기에 다른 공간을 갖는다. 나아가 가까운 미래에는 주유하기 위해 특정 장소에 간다는 생각조차 생소하게 여길 세대가 등장할지 모른다. 한 자동차 회사 광고에서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장난감 자동차를 운전하는 할아버지와 소음 없는 전기자동차를 생각하는 손녀의 문화 차이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공간에서도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주요 에너지원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재편되고 있다. 에너지원이 석유에서 친환경 요소로 바뀐다는 것은 주유소가 충전소가 된다는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석유를 위해 존재했던 수많은 공간과 시간, 나아가 우리의 삶에 관한 커다란 전환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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