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을 축복하는 이존립의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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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放談)

봄을 대표하는 화가의 낭만 가득한 시절 화양연화
사람과 자연의 행복한 만남 주제로 한 역작, ‘정원’
노련하고 자연스러운 필치로 구상미술의 백미 구현

이재언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4-01 09:44:21

빅데이터의 시대,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들이 엄청난 집적과 분류, 분석들이 광대무변의 대양처럼 넘치고 있다. 그것의 정확도와 효용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이런 점에서 궁금한 내용이 있다. 오랜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에게 힐링과 위로를 주는 작품들에 대한 자료들이 궁금하다. 어디엔가 존재하겠지만, 문외한에게는 그러한 자료들이 잘 포착되지 않고 있다.

개인적인 견해를 조심스럽게 피력하자면, 개념의 무게가 있는 작품보다는 감각적이고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 양식의 미술이 힐링에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의 다양함은 팬데믹이라고 단순화되거나 좁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환란 시에 복잡하거나 어려운, 혹은 무거운 주제의 작품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더욱이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설렘의 계절에 아무리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한 번쯤은 함께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인지상정이다. 독자들에게 뜨거움과 희망을 노래해주며, 건강한 미의식을 고양하는 예술작품이 생각날 때가 지금이 아닐까.

어떤 계절이 되면 으레 생각나는 곡이나 시, 그림이 있다. 이번 봄도 장범준의 ‘벚꽃엔딩’이 들릴 것이며, 그림으로는 이존립의 그림이 아른거릴 것이다. 작가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여수의 그림 같은 작업실에서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그림들을 일구고 있다. 그의 그림은 산뜻하고 낙천적이며 순수함과 청초함을 생명으로 한다. 또한 환상 속 무지개 같은 낭만이 가득한 화면 속에서 즐겁고 흥겨우며 고상한 영혼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존립의 그림은 자연과 사람의 이상적인 조화를 노래하고 있다. 녹음방초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사람이 빠지면 미완성인 것이 그의 그림이다. 사람이 있어 자연이 자연답고, 꽃이 꽃다워진다는 철학을 지니고 있다. 작가에게 사람이 꽃의 완성이며, 그림의 화룡점정인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 <꽃>처럼 말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동작과 표정 모두가 꽃을 노래하고 음미하며, 더불어 누리는 행복감을 엿보게 한다. 인물의 이목구비를 보면 약간은 찢어진 눈매를 가진 여인의 표정이 코믹한 데가 있다. 다분히 캐릭터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며 여타의 미인상과는 다른 개성적인 매력의 인물이 봄을 맞아 한껏 치장으로 멋을 낸 모습들이 사랑스럽다. 등장인물이 짓고 있는 표정이나 포즈 역시 꽃과 동화된, 꽃과 어울리는 이야기들을 정담(情談)으로 들려주고 있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존립의 그림이 있어 이 봄은 더 따뜻하고 화사하며, 흥겹고, 생기로 가득하다. 그의 대표적인 ‘정원’ 연작의 경우 따스한 축복의 햇살을 받고 있는, 그야말로 ‘걱정 근심도, 고통도 없는’ 태평성대이자 행복한 파라다이스의 공간으로 노래되고 있다.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그곳에서 휴식과 사색, 희열을 만끽하는 이상화된 공간은 작가가 또한 희구하는 낙원인지도 모른다.

대작 ‘정원-봄’(2020)의 경우, 형형색색 화려한 녹음방초와 그윽한 방향이 진동하는 그 공간은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유토피아, 즉 ‘이 지상에는 없을 것 같은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눈부시도록 화사한 오색의 향연으로 그곳엔 매혹적인 곡조도 있다. 휴대전화를 이어폰으로 연결하여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던 소녀가 졸음을 떨치려고 길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먼 훗날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 즉 화양연화(花樣年華)로 기억될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꽃들을 그리고 있어 싱그러운 생기가 감도는 것은 지당한 일이지만, 눈썰미 있는 사람만이 간파하는 작가 그림의 묘미를 지나칠 수 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화면에 노련하게 펼치고 있는 필치이다. 색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파초처럼 넓은 잎을 그릴 때나 작은 꽃송이를 그릴 때도, 수묵처럼 그 자체의 속도감을 통해 안료의 농담이 감각적으로 펼쳐진다. 여백에서 농담과 그러데이션이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필치에서도 자연스러움과 노련함이 묻어난다.

소위 구상회화는 추상주의가 패권을 잡은 이래 현대미술의 중심에 놓여 있지 못했다. 물론 구상미술도 구상미술 나름이다. 일반인들의 취미 활동 첫걸음이 대체로 구상이다 보니 퀄리티가 낮은 그림들이 많이 유통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며, 조금은 편견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취미활동들이 두터운 미술문화의 저변을 이루는 데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 특히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소통하며 향유하는 가운데, 미술 본연의 드높은 가치를 간직하는 건강하고 심미적인 구상미술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존립의 그림은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고 있으며, 구상미술의 위상 변화에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아름다운 꽃과 함께 하는 시절, 환상적인 그림과 함께 하는 시절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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