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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 개방 조치는 ‘약속...'))
모범생 기질의 윤석열, 약속 이행 의지 강해
경제 위기 등 상황 변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선진국, 공약 조정을 현실 적응 과정으로 파악
‘국민 이익을 위한 정치’라는 큰 약속에 집중을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북악산 남(南)측면’ 개방 조치는 ‘약속’과 관련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사례다. 청와대 측은 “2017년 대선 후보 때 북악산을 전면 개방해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공약을 했는데 이번 조치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의미”라고 밝혔다. 되짚어 보면 임기가 거의 종료되는 시점에 이뤄진 5년 만의 약속 실천이다.
아예 안 지킨 것보다는 낫겠지만 ‘대통령의 약속’이 지니는 반향이나 감동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청와대 자리를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는 차기 대통령에 대한 견제 심리 아니냐는 의혹, 개방 행사 때 문 대통령 부부가 절터 초석에 앉은 문제로 불교계의 항의를 받는 등 여러 구설만 남겼다. 약속을 지키는 시점과 약속에 이르는 과정, 그 진정성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차기 대통령인 윤석열 당선인은 약속 문제에서 과거 대통령들과 차별화되는 캐릭터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유세 현장에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후보들이 단골 멘트로 하는 말이거니 했다. 하지만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선거운동 때 “당선되면 찾아오겠다”고 약속한 장소에 다시 나타난 것만도 지난 한 달 사이 네 차례다. 서울 남대문시장, 울진 산불 현장, 서울 명동 무료급식소 등이다. 사소해 보이는 약속이라도 꼭 지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도 이런저런 관점을 떠나 “청와대를 벗어나겠다”는 약속 이행의 의지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주말 있었던 8개 장관 인선에서도 “할당이나 안배가 아닌, 능력 최우선 인사를 하겠다”는 평소 발언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기세다. 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도 나오지만 “윤석열정부의 소통과 통합, 균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의 약속도 여러 가지다. 먼저 남대문 상인들에게 한 것과 같은 인간적 약속이 있을 수 있다. 공정과 상식 등 국정 철학에 관한 것이 있고, 탈원전 폐기와 한미동맹 강화 같은 정책 문제도 존재한다.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반드시 필요한 공약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공약 전체에 일률적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유교 전통의 영향으로 정치인의 약속에 대해 도덕성의 영역으로 간주해 높은 이행 압력이 가해진다. 이에 비해 서구 사회는 덜 경직적이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와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가 맞붙었을 때의 일이다. 이라크에 파병한 미군을 언제 철수하느냐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매케인 후보는 처음에는 “이라크에 100년이라도 주둔시킬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오바마 후보는 “당선되면 즉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맞섰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진행되면서 두 후보의 말이 달라졌다. 매케인은 “가능하면 빨리. 대체로 2년 뒤”로, 오바마는 “16개월”로 각각 수정했다. 둘 다 현실성을 고려하는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가 미군 철수를 완료하기까지는 최종적으로 3년이 걸렸다.
이런 ‘약속 위반’을 미국 사회는 수시로 바뀌는 현실에 정책이 적응해 나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서로 다른 의견을 좁혀나가는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결과로 보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문화 차이다.
대통령의 약속은 선거공약으로 집약된다. 윤석열의 공약집은 ‘중앙 공약’과 ‘시도별 공약’으로 나뉘어져 총 400여 페이지에 이른다. 공약 자체가 선거 승리를 위해 이것저것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많은 공약의 실현 가능성은 일단 접어 두더라도, 정책들이 상호 충돌하는 모순이 나타나고 재원 조달 면에서 회의적인 것도 많다.
예컨대 시도별 공약에서 시도마다 각각 인공지능(AI), 첨단산업, 바이오산업 등을 육성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으나 전국 곳곳이 이런 산업단지들로 가득 채워질 리는 만무하다. 더 큰 문제는 재정 조달이다. 윤 당선인 측은 ‘중앙 공약’에 266조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너무 낮게 잡은 것이다. 시도별 공약에도 큰 돈이 들어가지만 국민의 힘은 계산에서 아예 빼놓았다.
사실 공약의 현실성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걸러져야 한다. 각 정당에게 공약집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책임한 공약을 못 내놓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어느 샌가 ‘아니면 말고’ 식의 포퓰리즘 공약이 대세가 됐다. 약속을 지키는 건 다음 문제다. 우선 이기고 봐야 되기 때문이다.
한국 선거가 ‘이익 투표’로 흐르는 양상은 전부터 두드러진다. 과거에 도덕성, 민주성, 이념, 정권 평가 등이 중심이 되던 ‘가치 투표’는 옛 추억에 불과하다. 2020년 민주당의 압승으로 귀결된 총선이 끝나고 한국정치학회가 실시한 유권자 의식 조사에도 이런 변화가 잘 나타나 있다. 유권자들은 37.3%가 정당을 보고 투표했고 34.9%는 정책과 공약을 보고 찍었다고 밝혔다. 반면에 도덕성을 보고 투표했다는 유권자는 4.0%, 이념을 보고 찍었다는 사람은 2.5%에 그쳤다.
다시 말해 투표할 때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올 것인가가 관심사였고 ‘내로남불’ ‘정권 심판’ 등의 사회적 명분은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얘기다. ‘위선 좌파’ ‘파시즘’ 등을 비판하며 용기 있게 나섰던 지식인 사회와 미디어는 허탈한 심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이런 혼탁한 선거판에서 당선된 대통령은 그럼 어찌 해야 하나. 유권자들이 윤석열을 지지했더라도 공약의 모든 걸 찬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황도 자꾸 변하고 있다. 최근 경제위기를 감안하면 자영업자 50조원 지원 같은 공약을 무조건 밀고 나갈 경우 물가를 더 자극하고 국채 발행에 따른 금리가 올라가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된다. 윤 당선인은 스스로 강조해온 ‘국민의 이익을 위한 정치’라는 보다 큰 약속에 맞춰 ‘공약 실천의 재구성’에 나서야 한다.
윤 정부의 초기는 어두운 전망이 지배적이다. 전임 정부가 남기고 간 상처를 수습하는 일만도 벅차 보인다. 이런 난국에서는 국민을 설득하는 정직성이 필수 덕목이 된다. 뒤로 숨지 않고 유체이탈로 얼버무리지도 않는 솔직함이 돌파구다. 그러나 정치 경험이 짧고 ‘모범생 기질’이 농후한 윤 당선인에게는 기대보다는 우려와 불안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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