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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스포츠인 프로배구 2021~22시즌 V리그의 최대 화젯거리는 세계적인 ‘컴퓨터 세터’인 김호철 감독의 전격적인 복귀였다. 그것도 V리그 1세대 지도자로서 남자배구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의 감독으로 두 차례나 V리그 통합우승을 일궈낸 명장이 여자부 감독으로 옮겨 큰 화제를 낳았다. 스포츠계의 속된 말로 남탕에서 여탕으로 넘어온 셈이다. 50년 넘는 그의 배구 인생에서 여자팀 감독은 처음이었다.
50년 배구 인생에서 첫 여자팀 감독
국가대표였던 주전 세터 조송화의 이탈, 감독·단장 동시 경질, 김사니 감독대행 퇴진 등 앞길이 보이지 않았던 구렁텅이 속에서 헤매던 IBK 기업은행 알토스의 소방수로 지난해 12월 투입돼 난관을 극복하며 명장다운 관록을 과시한 김 감독이었다. 2011년 창단한 여자배구의 신흥 명가 IBK 기업은행은 1라운드 전패에 이어 구단 최다인 8연패 수렁에 빠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60대 중반을 훌쩍 넘긴 그의 노련한 지도력을 앞세워 결국 5위(11승21패)로 시즌을 마감할 수 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곧바로 팀을 떠맡은 김 감독이 11승을 올린 것은 큰 성과로 평가받을 만하다. IBK 기업은행은 팀을 잘 추스렸고, 막판 연승을 달리며 ‘호철 스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2~13 시즌에도 감독과 선수들의 갈등이 폭발해 시즌 준비도 제대로 못해 8연패에 빠진 남자배구 러시앤캐시를 떠맡아 조직력을 다져 원팀으로 만들어 내며 소방수 리더십을 발휘했던 적이 있었다.
7개 구단으로 이뤄진 V리그 여자부의 경우 각 팀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리그 중단과 속개를 반복했고, 급기야 5라운드까지 성적만으로 순위를 정한 채 리그를 조기에 끝내야 했다.
해외 진출 1호 스타플레이어 출신
김 감독은 우리나라 구기운동 선수 가운데 해외진출 1호인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배구 선수치고는 키가 175㎝로 비교적 작은 탓에 세터 포지션을 맡은 그는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 등 선수로서 엘리트 코스와 꽃길만을 걸었다. 고향인 경남 밀양중학교에서 기량을 인정받은 김호철은 서울 대신중으로 스카웃됐고, 배구 명문인 대신고로 진학해 장래가 보장된 기대주였다. 한양대 1학년 때인 1975년 영광의 태극 마크를 단 것은 당연할 정도였다.
배구선수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날렸지만 소년 김호철은 어려서부터 달리기에 소질이 남달랐다. 대회마다 메달과 트로피는 모두 그의 차지였고, 초등학교 5학년 때에는 경남 도대표로 전국대회 우승까지 한 육상 꿈나무였다. 달리기 외에 넓이뛰기까지 했던 덕분에 점프력은 최고였다. 약속과 달리 학교에 육상부도 만들어지지 않은 데다 육상에 큰 흥미를 못 느낀 그는 배구팀에 들어간 뒤 점프력이 좋아 레프트 공격수를 맡았다. 운동 신경이 좋았던 만큼 배구 실력도 발군이었다. 육상부가 만들어졌더라면 그의 배구 인생은 싹을 틔우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여자배구는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동메달을 획득했지만 남자팀은 입상에 실패해 김호철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했다. 김호철의 인생을 바꿔놓은 무대는 197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였다. 한국이 4위라는 쾌거를 달성한 데에는 컴퓨터처럼 정교하고 현란한 그의 토스워크가 결정적 요인이 됐기 때문이다.
명세터로 이름을 날린 그는 대회 도중 이탈리아 클럽팀으로부터 이적을 제의받았지만 세계 최고의 배구시장인 이탈리아 무대를 밟게 된 것은 3년 뒤의 일이었다. 해외 언론들은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곡예를 부리는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김호철은 연봉 5000달러(당시 약 540만원), 계약금 1만달러라는 좋은 조건으로 이탈리아 파르마 클럽에 진출했다. 당시 국내 연봉은 200만~300만원 할 때였다.
첫 지도자 생활 때가 가장 힘들어
이탈리아 리그에서 MVP에 3차례나 오르며 명성을 날리자 국내 팀이 그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후원 아래 1983년 창단된 현대자동차 서비스에 입단한 김호철은 3년간 활약한 뒤 대통령배 우승 등 3관왕을 차지하고 이탈리아로 되돌아갔다. 국내와 해외에서 명성을 확인한 김호철은 다시 1987년 이탈리아에서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고, 1995년엔 자신의 이탈리아 첫 진출팀 파르마의 감독이 되어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뗐다.
그러나 처음 맡은 지도자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국내 선수들은 감독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했지만 이탈리아 선수들은 검은 머리의 동양인 감독에게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걸 일일이 설명해주는 게 쉽지 않았다. 더구나 선수시절에는 감독이 지시하는 것만 따라하면 됐지만 감독 자리는 20여명에 달하는 선수들의 심리상태와 컨디션을 일일이 파악하거나 보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선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고, 김호철도 그때가 배구 인생에서 최대 시련기였다고 말할 정도다. 이후 시슬리 트레비소 등 이탈리아 명문 클럽의 감독으로서도 성공했고, 국내에서도 프로배구가 출범하면서 친정팀 현대캐피탈의 사령탑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선 한국 남자배구를 우승으로 이끌어 지도력을 과시했다.
“배구공 하나로 개천에서 용 났다”
김호철은 스스로를 “개천에서 용 났다”고 말하곤 한다. 경상도 시골 촌놈이 서울로, 국가대표 선수 및 국가대표 감독으로, 그리고 이탈리아 진출로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발전시켜 준 것이 바로 배구였기 때문이다. 결혼도 태릉 국가대표선수촌 훈련 당시 여자 국가대표 세터인 임경숙 씨를 만나 이뤄졌다. 그의 인생에서 배구를 빼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딸은 이탈리아에서 배구선수로, 아들은 골프선수로 활약 중이다.
배구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밀알이 되어 어느 팀이든 어떤 직책이든 마다하지 않겠다던 김호철이었다. 그가 좌초 직전의 IBK기업은행 감독을 기꺼이 떠맡은 이유다. IBK기업은행을 지도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남자 선수들을 지도할 당시 선수들의 잘못된 플레이에 버럭같이 화를 낸다고 해서 ‘버럭 김호철’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지난 시즌에는 그런 모습이 일절 없었다. 스피드 등 경기력은 물론 여자 선수들과는 정서적인 교감에서도 달라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 무대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노병의 활약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8월 시작될 새 시즌에는 그만의 색깔이 코트에 그려질 것이 분명하다. 챔피언 결정전 6회 연속 진출, 3회 통합 우승에 빛나고, 도쿄올림픽 4강 멤버가 상당수 포진한 IBK기업은행이 김 감독과 함께 다시 비상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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