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약자와의 약속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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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수의 전지적 시점

절박한 약자와의 약속과 기억

기억은 예술·학문 등 인간의 지적활동 관장하는 인문학의 근간
정치인은 후보 시절 공약 ‘선택적 기억’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박혜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5-05 09:20:57

2013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비롯하여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가장 따뜻한 색, 블루(La Vie d'Adèle·Blue Is The Warmest Color)’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영상이 정말 아름답다. 퀴어 영화지만 상대가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관없이 사랑을 매개로 맺어지는 관계의 시작과 진행, 종말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흥미롭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주인공이다. 주인공인 아델과 엠마가 예술 그 자체인 존재와 예술을 업으로 하는 예술가라는 각각 결이 다른 캐릭터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엠마들, 즉 예술가들은 예술을 무기 삼아 생존과 자기실현의 전쟁터에 나선 전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 그들은 예술의 본질과는 무관한데 우리는 흔히 예술을 이야기할 때 본질보다는 그 전사들을 언급하곤 한다.

예술의 본질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은 대체로 영화 속의 아델처럼 너무 진하게 순수하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은 덜 순수한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부담스럽게 하기도 한다. 아델과 엠마는 바로 그런 서로 다른 존재성 때문에 설레고 풋풋했던 관계를 시들게 하고 서로 상처를 입히고 헤어진다.

나중에 엠마가 말한다. “너에겐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 영원히 그럴 거야, 평생 동안.” 사랑이라는 관계의 종말이 대부분 그렇듯이 영화는 그저 그렇게 쓸쓸히 끝난다.

영화는 사랑에 관한 아델의 기억 속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간다. 사랑이 기억으로 남듯이 예술 작품 또한 색감이며 음감, 문장 표현 등 기억을 토대로 한 기능을 빌어 끊임없이 다시 재생된다.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우리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본질적으로 예술과 가까운 존재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여신, 뮤즈들이 기억의 여신이 낳은 딸들인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나 고려 초에 왕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화 속의 신들도 혈통 보존을 위해 그랬는지 근친상간으로 자식을 낳은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 신화 속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이다. 므네모시네는 모자 관계이며 동시에 부부였던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나 조카인 제우스와 아홉 밤을 함께 지내며 뮤즈 아홉 명을 낳았다. 조카와 사랑을 한 것도 대단하지만 하룻밤에 딸 하나씩…. 정말 대단하다.

므네모시네는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모든 지적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딸들인 뮤즈는 학문과 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관장한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모든 분야는 므네모시네, 즉 기억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그리스 신화의 가계도가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기억은 인문학의 근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양심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간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물감의 색이 바라듯 기억도 희미해진다.

정직한 사람도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은 본능적으로 얼른 덮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이기적 존재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모아 저장하고 내보이는 ‘선택적 기억’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 후보 시절 유권자를 상대로 한 약속이 당선되고 난 후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변질된다면 문제다. 수많은 약속 중에는 사실 꼭 지키지 않아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도 있다. 이를 테면 대통령 집무실 이전 같은 것 말이다. 청와대를 국민께 돌려준다고 다 같이 그 안에 들어가 살 것도 아니고, 땅과 건물을 팔아서 전 국민이 나눠 가질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공약은 국민 입장에선 그리 중요치 않다. 그럼에도 대통령 당선인은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라며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집무실 이전을 강행하고 있다.

중요한 건 코로나19로 날벼락을 맞은 소상공인·자영업자 같은 절박한 사람들과의 약속이다.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기에 현실이 너무 팍팍하다는 걸 누구나 잘 안다. 하지만 절박한 사람들과 한 약속은 무리를 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어쩌면 유일한 희망이고 숨 쉴 틈이기 때문이다.

실망과 분노를 감내하며 5년을 지내 온 그들과 우리가 또 똑같은 5년을 보내게 되지 않도록, 다음 주면 취임할 대통령 당선인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선택적 기억이라는 달콤한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기억 중에는 본질적으로 잊어도 되는 것도 있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