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주 
2002년 6월 빛고을 광주에서 열린 한일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은 ‘무적함대’ 스페인을 승부차기 끝에 5-4로 꺾고 4강 신화를 이뤘다. 120분간의 혈투 끝에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대한민국은 황선홍, 박지성, 설기현, 안정환, 주장인 홍명보가 잇따라 골을 성공시킨 반면 스페인의 네번째 키커 호아킨 산체스 로드리게스의 슛팅은 골키퍼 이운재의 손에 그대로 걸려들었다.
승부차기 실패한 선수, 모두가 기억
골문과 11m 거리에서 차는 페널티킥이나 승부차기를 성공시킨 선수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것이 페널티킥의 악몽이며, 러시안 룰렛이라고 불리는 이유일 게다. 하지만 실축한 선수는 팬들의 거센 비난에 스스로 위축되며, 모두가 두고두고 기억하게 마련이다. 페널티킥은 키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과 스페인 대표팀 선수들 대부분이 은퇴했지만 단 한 명만 예외다. 스페인 대표팀의 오른쪽 공격수였던 호아킨 산체스가 그 주인공이다. 승부차기 실축으로 한국에 월드컵 4강 티켓을 내준 뒤 붉은 색으로 도배한 축구장 한복판에서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아 울던 그가 아직도 현역으로 뛴다. 올해 41살로 필드 플레이어로서 맹활약하고 있으니 실로 대단하다.
호아킨은 무늬만 현역인 게 결코 아니다. 스페인 프로축구 1부 리그(라 리가) 레알 베티스의 별이다. 2019년 말에는 라리가 역대 최고령(38세 140일) 해트트릭을 달성해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37세255일) 기록을 55년 만에 갈아치웠는가 하면 596경기에 출전해 필드 플레이어로서 라 리가 최다 출장기록 1위를 기록 중이다.
팀 창단한 지 115년 된 레알 베티스의 연고지는 스페인 남부 세비야. 카르멘을 앞세운 관광 산업과 올리브 나무 말고는 이렇다 할 수입원이 없는 도시인데도 팬층이 나뉜다. 그나마 먹고 사는 중산층은 세비야 FC,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들은 레알 베티스 팬이다.
승부차기 실축 수만번 머릿속 떠올려
호아킨은 세비야 근처 바닷가 마을에서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여덟 번째 임신을 알고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그럴 돈조차 없어 결국 낳았다. 대신 막내에게 여섯 살까지 젖을 물리는 것으로 죄책감을 달랬다. 호아킨은 헤라의 젖을 먹고 자란 헤라클레스처럼 힘세고 날쌘 아이로 자랐다.
그는 세비야를 오갈 기차표도 사기가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축구 천재성 하나로 16살에 베티스에 입단했고, 18살이던 1999년 라 리가에 데뷔했다. 2002년 2월 국가대표 데뷔 경기였던 포르투갈과의 평가전에서 맹활약을 펼친 덕분에 한·일월드컵 명단에 포함돼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과의 8강전에서 호아킨은 한국의 왼쪽 수비 진영을 헤집는 성난 황소처럼 그라운드를 누볐다. 서든 데스로 승부를 가리는 연장전 후반에는 왼쪽 허벅지에 근육통이 왔지만 이를 꾹참고 120분을 달렸다. 몸이 좋지 않았지만 승부차기 명단 5명에 포함됐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승부차기 실축이 연장전까지 맹렬했던 호아킨의 120분 헌신과 희생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승부차기 실축 장면을 수 만번쯤 떠올렸다고 회한하는 호아킨이다. 승부차기 실축으로 세계 축구계의 미미한 존재였던 한국팀에 패했기에 팬들의 따가운 비난이 없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재기를 꿈꿨다.
페널티킥이나 승부차기를 실패해 신세를 망치거나 영원히 그라운드를 떠난 선수들이 더러 있다. 팬들의 비난과 욕설에 시달려서였다. 악성 축구팬이나 도박꾼들이 판을 치고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에서 뛰는 선수라면 살해 협박이 날아오고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1969년 10월 서울운동장(지금은 철거되었음)에서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한국과 호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한 임국찬이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킥에 정평난 임국찬은 페널티킥을 실축해 1-1로 비기는 바람에 한국 축구는 월드컵 진출의 꿈이 깨어졌다. 모든 비난은 임국찬에게 쏟아졌고 견디다 못한 그는 미국으로 홀연히 이민을 떠났다.
하지만 호아킨은 승부차기 실수로 머리를 쥐어뜯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당시 21살의 그에게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렇지만 ‘지더라도 베티스 만세(Viva er Betis manque pierda)’라는 레알 베티스의 응원구호처럼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날 이후 559경기를 소화하며 약 80골을 터뜨렸다.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실수를 범했지만 팬들에게 속죄한다는 차원에서 그라운드에서 더욱 치열하게 달렸고, 절망을 딛는 법을 터득했다.
연봉 자진 삭감하고 친정팀 컴백
다시 축구화를 신은 호아킨은 2005년 베티스에 코파 델 레이(스페인 국왕컵) 우승을 안겼다. 그는 첼시 등 부자 구단의 영입 제안을 줄줄이 뿌리치고 베티스에 계속 남으려 했지만 재정이 빈약한 팀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2006년 구단 역사상 최고 이적료(2500만유로)로 발렌시아로 이적했다. 이후 말라가와 이탈리아 세리에A 피오렌티나에서 뛰다가 2015년 여름 ‘마음의 고향’인 베티스로 돌아와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과 중동 클럽이 돈 다발을 흔들었지만 축구 인생을 시작한 곳에서 마지막을 불태우고 싶다는 의리와 함께 돌아왔다. 연봉을 절반 이상 자진 삭감한 계약이었다. 호아킨은 프로 선수이지만 한 번도 돈 때문에 축구를 한 적이 없으며, 심장이 가리키는 곳에서 공을 찼다. 피오렌티나에 몸담았던 2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라 리가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올해가 라 리가 20번째 시즌이다. 주전으로 꾸준히 뛰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라운드에 오래 서 있는 자가 강하다
강한 자가 오랜동안 남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라운드에 서 있는 자가 강한 자라는 메시지를 던져 준 호아킨이다. 더구나 그는 20년 전 악몽을 스스로 깨뜨렸다. 국가대표 경기가 아닌 클럽 팀에서는 승부차기 상황을 맞기가 쉽지 않지만 4월 말 2021~22 스페인 코파 델 레이 발렌시아와의 결승전에서 연장까지 모두 소화한 뒤 두 번째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했고, 당당하게 5-4로 승리하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좀처럼 강심장이 아니면 서 있기 조차 힘들고, 모두들 꺼리는 승부차기 명단에 자원했다고 한다.
베테랑이 된 지금도 승부차기는 쉽지 않지만 20년 전의 아픈 상처를 털기 위해서 였다. 이제서야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게 됐다는 말로 소감을 밝힌 걸 보면 한·일월드컵 8강전 승부차기 실패가 여지껏 가슴 속 한켠에 한으로 남아 있었다는 얘기다. 호아킨이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메시지는 강렬하다. 누구나 실패와 절망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게 호아킨의 축구인생이 주는 교훈이다. 절망을 딛고 일어나면 더 오래 달린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팬들에게 보여줬다. 호아킨은 황혼기의 선수다. 길어야 앞으로 1~2년 더 뛸 것이다. 감동 스토리를 전해준 그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라운드를 떠나더라도 호아킨 만세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1
감동이에요1
화나요0
슬퍼요0
대하역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