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앗아가는 것들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박혜수의 전지적 시점

전쟁이 앗아가는 것들

병사들 전사·도시 파괴·경제적 어려움 등 숱한 문제 야기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초들의 일상·사랑·행복도 앗아가

박혜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5-26 09:20:17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십여 년이 지난 1930년대 파리, 폴리냑 공작부인의 살롱에는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클로드 드뷔시, 가브리엘 포레, 에릭 사티 같은 음악가는 물론 장 콕토, 마르셀 프루스트, 이사도라 덩컨, ‘러시아 발레단’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클로드 모네,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르 코르뷔지에 등 20세기 초 유럽의 거의 모든 유명인사들이 공작부인의 손님이었다.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도 공작부인의 손님이자 전속 피아니스트로 살롱에 드나들고 있었다. 당시에 하스킬을 만난 찰리 채플린은 훗날 아인슈타인, 처칠과 함께 그녀를 자신이 만난 세 명의 천재 중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천사 같은 외모와 빼어난 연주로 찬탄의 대상이던 그녀는 이십 대에 들어 갑자기 등이 굽는 척추측만증에 걸리고 만다. 그 후 병마에 시달리느라 외모도 차츰 변해 가고 활동도 뜸해져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렇다 할 커리어도 쌓지 못한 채 어느새 그녀는 나이 마흔을 넘기고 있었다.

1935년이 저물어가던 어느 금요일 오후, 폴리냑 공작부인의 살롱에서 클라라 하스킬은 같은 루마니아 출신의 젊은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Dinu Lipatti)를 만났다. “부카레스트에서 당신 연주를 들은 적 있어요.” 그날 이후 두 사람은 3년여의 시간을 날마다 만나 함께 연주하고, 밤늦게까지 전화를 주고받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꿈같은 시간이었지만 밖에선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고 독일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2차대전이 시작되고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해 오자 디누 리파티는 어머니와 함께 루마니아로 돌아가고 홀로 남은 클라라 하스킬은 마르세이유를 거쳐 스위스로 피신한다. 척추측만증은 물론 뇌종양·심장병 등 온갖 병에 시달리며 빈곤과 공포를 견디는 동안 그녀의 외모는 팔십 대 노인처럼 되어 간다.

디누 리파티는 루마니아에서 마들렌이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해 버리고 클라라 하스킬은 2차대전이 끝나고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십세기 최고의 여성 피아니스트로 불리며 그뤼미오(Arthur Grumiaux)와 협연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소나타 등의 명반을 남겼다.

▲클라라 하스킬(오른쪽)과 디누 리파티. 독일 THARA사 헌정음반 자켓 사진. [사진=필자 제공]

클라라 하스킬의 연주는 청초하고 아름다운 터치로 유명하다. 그러나 맑은 음색은 분명한데 똑같은 ‘미(mi)’ 음의 건반을 눌러도 그녀의 손이 닿으면 먹먹한 슬픔의 느낌이 감돌아 온다. 병마와 가난, 고독…, 그리고 기적처럼 찾아왔던 사랑을 전쟁이라는 뜻밖의 사건으로 끝내야 했던 파란만장함이 만들어내는 슬픔의 기운일 것이다.

전쟁은 그래서 나쁜 것이다.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도시가 망가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민초들의 사소한 일상에 비극적인 사연을 더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것이 전쟁이다.

2022년 5월 17일, 우크라이나는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군사작전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남아 있는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러시아가 마리우폴을 점령했다고 선언한지 27일 만의 일이다. 여기저기 포탄만 쏟아 붓던 러시아군이 최초로 승리다운 승리를 거둔 셈이다.

마리우폴이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한 후 식량은 물론 식수조차 끊긴 상황에서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최후의 보루 삼아 항전하던 우크라이나 병사들의 하루하루가 어땠을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버텨 준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은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이자 북동부 요충지인 하르키우에서 러시아군을 국경 밖까지 몰아낼 수 있었다.

이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마리우폴에서 러시아군의 포로가 된 2439명의 안위에 대한 것이다. 러시아는 그들을 ‘나치’라고 부르고 있다. 갑자기 나치가 어디서 나타났다는 건지... 억지스러운 그 명칭에서 순순히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악의가 보여 섬뜩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경제가 어찌되었다든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그들과 연결된 많은 민초들의 삶과 사연에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전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간다. 많은 것을 변하게 하고 변질되게 하며 삶의 방향을 틀어 놓기도 한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픈 사연을 쌓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인류가 함께 책임지고 극복해야 할 불행, 비극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땠는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도움을 호소하는 방송을 하는 동안 우리 국회의원들은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하품을 했고 꾸벅꾸벅 조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런 무관심이 포악한 강자를 날뛰게 하는 것이다. 세계 22위의 군사력을 가진 우크라이나가 강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힘겨운 항전을 계속하고 있음을 우리 또한 절대로,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혜수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