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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정세가 매우 민감한 시기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국내 여론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열흘 만에 전격적으로 한·미 정상 회담이 한국에서 열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례적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한국의 신임 대통령이 미국을 먼저 방문하거나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방문 시에는 일본에 이어 한국을 찾는 것이 관례였다. 미국과의 행사가 있으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노출되고 회담 성과를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으레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의로 국내 반응이 차분하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좀 더 높은 듯하다.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2년 이상 지속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자원이나 식량을 무기화하려는 국가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경제와 안보가 하나의 축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서로 도울 수 있는 친구나 이웃, 즉 동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가 대부분의 국가들에 공감대가 되고 있다. 강대국들의 이권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특히 더 절실하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아시아 방문 목적은 일본에서 열린 IPEF(인도·태평양 경제협력포럼) 출범과 쿼드(Quad), 즉 4자(미국·일본·인도·호주) 안보 대화 참가였다. 둘 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포위 전략의 일환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IPEF에는 미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인도, 호주와 뉴질랜드, 동남아(ASEAN) 7개국 등 13개국이 참여했다.
동(東)아시아 국가 중 빠진 나라는 중국, 북한, 대만,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이다. 장기판을 놓고 보면 결국 대부분 국가가 미국 편에 서고 중국에 등을 돌린 셈이다. 다만 IPEF가 단순 협의체라는 점에서 향후 회원국에 어느 정도의 구속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IPEF의 새로운 룰 세팅 규범은 △공정하고 회복력 있는 무역 △공급망 회복 △청정에너지·탈탄소화·인프라 △조세·반부패 등 4대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호가 개방돼 있다고 말치레하지만 중국이 현실적으로 이를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로 인해 기존 경제 블록인 중국 주도의 RCEP(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나 일본 주도의 CPTPP(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관점을 돌려 바이든의 방한을 놓고 보면 미국의 대외 전략에서 한국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절실한 동맹이라는 것이 확인된 점에 주목하게 된다. 5년간 문재인정부는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으로 일관하면서 양국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결과가 빚어졌다. 그렇다고 중국으로부터도 확실한 경제적 동반자로서의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이를 반영하듯 우리 내부의 미국과 중국에 대한 팽팽했던 선호도가 최근 미국 쪽으로 급격히 옮겨 가는 양상을 보인다. 2030 MZ세대의 중국 혐오 혹은 기피 현상도 두드러진다.
이런 기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미국이 보수정권으로 교체가 되자마자 한국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민첩함을 보였다. 양국이 다시 밀월관계로 회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미국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안보보다 경제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는 실리적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 현저하게 눈에 띈다.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서 한국 기업의 기술 혹은 제조 인프라의 중요성이 확인되고 있다. 트럼프정부와 현 바이든정부가 한국을 대하는 근본적 시각 차이이기도 하다.
글로벌 질서에서 민간 비중 확대 추세, 간판 기업에 대한 소중함과 중요성을 인식해야
바이든의 한국 내 일정을 보더라도 주연은 삼성이나 현대 등 대기업이고 윤 대통령은 마치 조연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삼성 반도체 공장이었다. 반도체 동맹에 삼성을 불러들이고 미국 텍사스주에 대규모 투자(170억달러, 20조원)를 끌어냈다. 마지막 날 최후에 만난 기업도 현대자동차다. 조지아주에 전기차 제조 공장 설립과 미래 모빌리티 기술 등 투자에 대한 확약(105억달러, 약 13조2000억원)을 받았다.
이외에도 배터리·태양광·바이오 등에 국내 대기업으로부터 투자 보따리를 든든하게 챙김과 동시에 한국과의 원전 협력의 고리도 연결했다. 11월 치러지는 중간 선거에서 현재 불리한 판세를 만회해 보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더 큰 의미에서 보면 미국 제조업의 재건이다. 제조업 없이 금융이나 소프트웨어, 국방력만으로는 강력한 패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초조함에서 비롯된 행보이다. 중국과의 경쟁에서 열세를 보이는 제조업 기반과 미래 먹거리 산업에 대해 동맹을 규합해서라도 미국이 우월적 지위를 확보해 나가겠다는 계산이다.
통상 외국 정상의 특정 국가 방문 형식은 국빈 방문(State Visit)·공식 방문(Official Visit), 실무 방문(Working Visit)·사적 방문(Private Visit) 등으로 나뉘며 각각에 따라 의전의 차이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은 공식 방문이었고 관례에 따라 질 바이든 영부인이 동반하지 않았다. 국가 정상이 가능한 한 영부인을 대동하는 호화 국빈 방문을 선호하는 우리와 달리 경쟁국들은 실사구시적 실용 외교에 익숙하다.
국익을 만들어 내는 정부의 기술이 노련하다. 기업인 혹은 실세 정치인 등을 포함하는 외화내빈의 대통령 행사 사절단을 고집하는 우리와 차이가 크다. 때에 따라서는 이러한 식의 이벤트가 통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리만 요란하지 결과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대통령 방문국마다 방문 성과를 꿰맞추려고 갖은 안달을 한다. 6개월 혹은 1년이 지난 후 내용을 피드백해 보면 내놓을 만한 결과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가진 오랜 경륜과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바이든식(式)의 국익 창출 실용 외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으로 곱씹어 봐야 할 것은 공공부문보다 민간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현실 인식이다. 세계적 지명도를 가진 간판 기업이 있어서 미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중국까지 편 가르기를 놓고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정권의 집권 기간과 비교해 기업의 생명력은 수백 년 장수하기도 한다. 경제와 안보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질서의 재편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그 중심에서는 정부 아닌 민간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바이든정부가 삼성과 대만의 TSMC를 두고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신뢰 가능한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모호성이 아닌 용기와 신념이 필요하다는 교훈도 확실하게 전수했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글로벌 정세를 보면 향후 5년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가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유무역은 위협을 받고 반(反)세계화에 따라 분열이 가시화되고 있다. 전문성과 유연성을 기반으로 한 실용적 사고와 행동을 겸비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좁아진다. 보여주기식이나 허례허식을 걷어 내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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