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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수의 전지적 시점

박혜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6-02 09:12:48

20세기 전설의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마지막 앨범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에 ‘So long, Frank Lloyd Wright’라는 노래가 들어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좋아했던 아트 가펑클이 부탁해서 폴 사이먼이 만든 노래다. 사이먼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별을 암시하는 듯한 가사와 멜로디가 서정적인 노래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직설적 언행, 유부녀와의 연애행각, 두 번의 이혼과 두 번의 큰 화재로 툭하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괴팍한 천재, 모더니즘 건축의 창시자다. 그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콘크리트로 지은 간결한 형태의 건물로 건축의 새 지평을 열었다.

동시에 그는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풍경화 속의 집과도 같은 느낌의 ‘유기 건축(organic architecture)’을 지향한 자연친화적 건축가이기도 하다. 공간을 용도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넓게 터놓는 오픈플랜 방식을 선호한 그는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일본 도쿄의 제국호텔 같은 건축물을 남겼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함께 현대 건축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장인 정신에 기초한 아름다운 건물을 고집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달리 르 코르뷔지에는 지극히 모던한 스타일로 기능을 중시한 합리적 디자인을 지향했고, 미스 반 데어 로에는 훗날 20세기를 규정하는 키워드가 된 ‘유리와 철재(Glass & Steel)’를 건축 자재로 등장시킨 마천루 건축의 선구자였다. 모더니즘을 지향하면서도 각기 다른 세 사람의 스타일은 조금씩 변형되며 현대 건축·디자인의 원형이 되었다.

▲ 르 코르뷔지에의 ‘노트르 담 뒤 오 예배당(Chapel of Notre-Dame du Haut)’. [사진=필자 제공]

이들 중 독일 출신의 미국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성공의 비결을 물을 때마다 이 말을 했다는데 그 후 이 말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로 변형되어 많이 쓰이게 되었다. 자칫 넘겨 버리기 쉬운 작은 요소들이 일의 성패나 결과물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의미로, 디테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디자인과 패션 업계에서 주로 쓰였지만 지금은 비즈니스·정치·주식투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디테일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유행어가 되었다.

2012년 제18대 대선 때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단일화 협상을 시작하면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도 두 사람은 결국 협상 과정에서 적합도·지지도 등 여러 디테일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막판에 가서 안 후보가 전격적으로 후보 사퇴를 선언하며 단일화를 이루긴 했지만 누가 봐도 꼴사나운 임시 봉합이었다. 민주당에서 기대했던 훈훈한 효과는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디테일에 숨어 있던 악마가 판을 헤집어 놓은 셈이다.

언젠가부터 대선이 끝나고 나면 정계와 언론에서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자주 들먹여 왔다. 후보가 급한 대로 내놓았던 공약들의 실현 가능성과 문제점을 따지고 지적하기 위해서다. 이 말과 함께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 또한 자주 등장한다. 실사구시란 ‘사실을 얻는 것을 힘쓰고 항상 참 옳음을 구한다’는 뜻으로 청나라 때 고증학자들이 지향했던 학문의 방법론이다.

이 말을 살짝 비틀어 풀이하면 ‘팩트와 실용 중시, 공정과 정의 지향’이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무엇보다 강조한 개념들이다. 허무맹랑한 탁상공론에 놀아나며 갈수록 삶이 힘들어지는 나날을 보내야 했던 지난 5년에 지친 국민 대다수가 마음속으로 환호하며 반긴 개념들이다.

실용을 중시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탁상공론·주의주장에서 벗어나면 일단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방한했던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도 온화한 미소와 함께 실용 중심의 외교술을 한껏 펼치고 갔다. 몸짓이며 표정 하나하나가 과연 노련한 정치인다웠다. 11월에 있을 중간선거를 의식해 국민 앞에 풀어놓을 선물 보따리를 잔뜩 챙기러 온 것이라는 비아냥 섞인 뒷말도 무성하다. 아무튼 그는 필요한 것을 챙겨 돌아갔다. 하지만 그런 실용주의에는 온기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가 윤석열정부에게서 기대하는 건 따뜻한 실용주의·참된 실사구시의 구현이다. 공약을 모두 실행하기에 주변의 여러 상황이 녹록치 않고 헤쳐 가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정부의 행보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어야 한다. 작은 것 하나라도 허투루 뭉개고 넘어가지 않도록 틈틈이 일깨워 주기도 해야 할 것이다.

윤 대통령이 후보 시절 거듭 강조했던 ‘약자와의 동행’ 또한 지켜질 수 있다면 드디어 이 나라가 나라다운 나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그가 이끄는 새 정부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고자 한다. 그리고 새 정부에 실사구시 한 묶음에 디테일 두 박스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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