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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부 9년간 한국 경제는 글로벌 혁신 경쟁에서 오히려 뒷걸음쳤다. 박근혜정부는 탄핵으로 중도에 하차하면서 제대로 된 정책을 펴보지도 못했다.
문재인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움으로써 5년 내내 갈등과 파행을 거듭했다. 정권 후반기에 디지털과 그린을 앞세운 ‘한국판 뉴딜’을 선포하긴 했으나 지나치게 이상과 이념에 치우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규제 철폐와 내부 혁신 그리고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가 동반되지 않으면 결국 허사가 되고 만다는 것을 입증했다. 외부 경쟁국들이 이 기간에 더 실질적이고 과감한 조치로 미래 경쟁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인 것과 대조적이다.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코로나에 대응하여 미래 먹거리 산업 선점을 위한 제조업 기반 재구축과 공급망 재편에 따른 자국 산업의 안전망 확보에 주력했다.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사태가 겹치면서 격차가 더 벌어지는 충격을 완화해 주었다는 점에서 다소나마 시간을 번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지난 9년이 우리 경제의 대전환을 준비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었지만 결국 귀중한 시간을 허송하면서 날려버렸다. 결과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 중소기업의 자존심이자 최대 효자 수출 품목인 자동차부품에서 곡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자동차 패러다임이 내연기관에서 전기로 바뀌면서 부품 소요 수도 3만개에서 3분의 1 이상 줄어들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에 안주하다 보니 올 것이 온 것이다. 최근 원자재 가격 상승까지 겹치면서 곪은 상처가 일시에 터져 자동차 산업 생태계가 크게 흔들리면서 붕괴 직전으로 내몰리는 상태다.
내연기관 부품 공급 능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보이던 부품 업계가 ‘미래 모빌리티’로의 전환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9300개 국내 부품 업체 중 미래차 관련 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은 고작 전체의 2.3%(213개)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대로 가면 부품 업체 10곳 중 3곳이 도산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마저 나온다.
2030년까지 자동차 산업에서만 최대 40만개의 일자리가 감소할 것이라는 보고서도 있다. 국내에서만 3만개가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부품이 줄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상이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한계 상황에 몰려 없어질 가능성이 크고, 생존을 위한 연계와 협력 혹은 통합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모양새다. 자동차는 이제 기계가 아닌 전자 제품이다. 자율주행 자동차까지 가세하면서 메커트로닉스(Mechatronics)로 변모한 지 이미 오래다.
이에 따라 산업간 융합은 물론이고 정보기술(IT) 플랫폼 기업이 완성차 메이커와 결합하는 합종연횡이 전면에 등장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가파르다. 시장은 지속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일부 대기업 혹은 중견기업을 제외하고는 이에 속수무책이다.
또한 산업 생태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술 적용에 필요한 전문 인력 공급이 시급하지만, 손을 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우리가 글로벌 미래 경제 전쟁에서 갈수록 뒤처지고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모래주머니’ 떼려면 제조업 생태계 혁신 위한 조치 당장 서둘러야
상황 변화에 민첩한 대응이 가능한 삼성전자, 현대차 등 대기업은 이 와중에도 흑자 행진을 계속한다. 시장의 역설이라고나 할까? 이들은 오히려 더 잘나간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 시 대기업들이 미국에 대한 투자 보따리를 풀었다. 그동안 곳간에 쌓아둔 여유 자금을 시장이 있는 곳에 꺼내놓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지난 정부에서 투자에 그토록 인색하던 국내 간판 기업들이 신(新)정부 출범과 동시에 국내 10대 대기업이 향후 5년간 1000조원 투자를 하겠다는 계획을 속속 발표했다. 일자리도 40만개나 신규로 창출하겠다고 한다.
정부의 친(親)기업 행보에 보조를 맞추겠다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려면 제조업의 생태계가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생태계는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중소기업이 동반하고 상생해야 지속 가능해진다. 과거의 같이 말치레를 반복하거나, 시늉 혹은 생색만 내는 안일한 접근으로는 장밋빛 계획으로만 그치고 결국 공수표가 되고 만다.
세계는 지금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앞두고 각국이 이익 확보를 위해 첨예한 각축전을 보인다. 중심에는 미래 먹거리와 관련 ‘제조업 허브’ 경쟁이 자리를 잡고 있다. 미국이 선두에 나서고 있는 것도 제조업 부활 없이는 유일 패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숱한 압력에도 중국이 건재하고 있는 것은 견고한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고, 미래 산업에 대한 투자를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리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고, 우리가 미국에 기울어지는 것에 대해 중국이 극도의 경계감을 표시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강하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우리 간판 기업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없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근거가 없어진다.
최근 경제와 안보가 하나의 축에서 움직이고 있고, 경제의 핵심은 바로 제조 기술이다. 제조 강국이 글로벌 공급망과 미래 먹거리 산업 재편 과정에서 린치핀(중심축)이 서는 현상이 선명하다.
미국·중국·독일·일본과 더불어 제조 5대 강국이던 한국의 위상이 인도에 밀려 6위로 추락하는 양상이다. 지나친 해외의존도로 인해 원자재 파동이나 부품·소재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속수무책으로 충격을 받는 사태가 반복된다.
한편 미래 제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술 인력 부족으로 인한 일자리 미스매칭이 급증하고 있다. 산업계 수요는 학력보다는 능력을 요구하지만, 교육 인프라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국내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이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 아시아권에서도 뒷순위로 전락하고 있다. 대학은 학위를 주는 곳이 아닌 평생교육 현장으로서 제조 생태계가 필요로 하는 인력의 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초·중·고의 학제나 커리큘럼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법인세·상속세도 합리적으로 낮추고 규제를 풀어 해외로 나가는 기업을 국내에 묶어둘 수 있는 당근을 획기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모래주머니를 달고 글로벌 경쟁이 어렵다는 대통령의 말이 한국 제조업 생태계의 경쟁력 복원으로 이어지려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즉각 실행에 옮기고 중장기적 과제는 문제를 푸는 시동을 걸어야 한다. 한국이 사는 길은 제조 강국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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