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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공희 대주교의 책 ‘북한 교회 이야기’가 최근 출간됐다. 윤 대주교는 1924년 태생으로 우리 나이로 99세다. 천주교 뿐 아니라 한국 종교계를 통틀어 최고 원로일 것이다. 윤 대주교가 5.18 민주화운동 때 광주대교구장으로 있었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북한 공산정권의 종교 탄압을 몸소 체험한 몇 안 되는 생존자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잘 모르는 것 같다. 책 제목 ‘북한 교회 이야기’는 그래서 더 눈길을 사로잡는다.
북한 공산정권과 종교는 공산국가에서 다 그렇듯이 공존할 수 없는 관계였다. 러시아의 공산혁명가 레닌은 “종교는 현존에 대한 요구를 중도에 가라앉혀 버리는 값싼 정신적 술”이라고 규정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혁명’ 대신에 ‘체념’을 가르친다는 얘기다. 북한에서의 종교와 종교인 탄압은 이처럼 예정된 것이었으나 본격화된 것은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부터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원산에 있던 덕원신학교와 수도원의 수난이었다. 이곳은 천주교 북한 포교의 거점이었는데 1949년 5월9일 북한 정치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덕원수도원장 등 독일인 사제 4명을 체포해 갔다.
북한은 이미 토지개혁이라는 명목으로 덕원신학교 소유의 토지 440헥타르를 몰수한 상태였다. 이틀 후인 5월11일에 또 34명의 독일인·한국인 사제들이 끌려간 이후 덕원수도원과 신학교는 강제 폐쇄됐다. 이 사건으로 독일인 25명, 한국인 13명의 순교자가 발생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천주교가 겪은 가장 큰 수난이다.
윤공희 대주교는 당시 덕원신학교 학생으로 현장에 있었다. 그는 ‘북한 교회 이야기’에서 또렷한 기억력으로 천주교의 혹독한 시련을 증언하고 있다. 한국 종교사에 귀중한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99세의 대주교가 쓴 북한 체험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매우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상식적이라면 책의 출간은 오래전에 이뤄졌어야 했다. 윤 대주교라는 증인의 비중으로 봐서도, 사안의 중대성으로 봐서도 그렇다. 오래 생존해 계셨기에 망정이지 먼저 세상을 떠났더라면 그의 체험은 그대로 묻혀버렸을 것이다. 책의 출간을 최대한 늦춰야 할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던 걸까.
당시 희생된 순교자들을 기리는 움직임이 최근에야 가시화된 것도 반가움 반(半), 아쉬움 반이다. 지난달 천주교는 홍용호 주교와 미국 출신인 패트릭 번 주교 등 78명에 대한 시복(諡福)의 국내 절차를 마무리했다. 북한 당국에 의해 피살되거나 수감 중에 타계한 사람들이다.
이들과는 별도로 덕원신학교 사태 때 수도원장으로서 순교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등 38명에 대해서는 2017년에 같은 절차가 완료된 바 있다. 최종 시복은 앞으로 로마 교황청이 결정하게 된다.
‘시복’이란 가톨릭교회가 복자(福者)로 선포해 공적으로 공경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인 순교자들이 소속된 독일 천주교 쪽에서는 시복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순교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데도 한국 천주교는 시의적절하게 대응해 온 것 같지 않다. 당시 순교했으면서도 이번 시복 대상에서 빠진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쪽도 다르지 않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 5월 ‘6.25전쟁 전후 기독교 등 종교인 학살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에 착수했다.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최초의 진상 규명이다.
지난해 서울신학대 연구팀이 진실화해위 의뢰로 사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남한에서 북한군에 의해 희생된 종교인은 기독교인 1026명, 천주교인 119명 등 모두 1145명(납북자 포함)이었다. 이전까지는 이런 수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6·25가 시작된 것으로 치면 72년, 끝난 걸로 계산하면 69년 동안 이들은 ‘잊혀진 순교자’로 남아 있었다. 그동안 국가와 민간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종교계조차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들은 왜 철저히 외면당한 것일까.
한국이 원래부터 북한에 납치된 사람들에 대해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은 맞다. 일본은 북한에 납치당한 17명에 대해 끊임없이 북한에 송환 요구를 하고 국제사회에도 호소하고 있지만 한국은 6·25 때 9만6000명, 그 이후에도 516명이라는 훨씬 많은 납북자를 두고 있으면서도 손을 놓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 안에 포함된 종교인 문제라고 별 수 있겠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종교만의 특수한 사정도 존재한다. 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를 기리는 것은 종교의 사명과도 같다. 북한의 종교 탄압은 가혹했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천도교 등 모든 종교가 소유 재산을 빼앗기고 교회 사찰 등 신앙의 터전을 상실했다.
6·25 전쟁을 전후해서는 다수의 종교인이 학살됐다. 지금까지 드러난 희생자 수는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유가족이나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벌써 많은 진실이 묻혀 버렸다.
윤공희 대주교의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 절절하다. 그는 북한을 빠져나와 남한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뒤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맡았는데 1950년 6월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는 강론을 통해 신자들에게 호소한다. “교우 여러분, 이제 공산국가가 되면 우리 천주교는 박해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박해를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순교자들의 후손입니다.”
한국 종교계의 큰 모순은 북한에 대한 태도다. 북한 공산정권에서 모든 종교가 말살의 피해를 당했는데도 종교계 일부의 친북적·좌파적 성향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이들은 북한 순교자들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누구는 민족 화해와 일치를 강조한다. 북한이 싫어하는 이슈를 부각시키면 남북 관계도 그렇고 종교 전체적으로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또 용서를 거론하기도 한다. 일반 정서와는 다른 종교만의 접근방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진상 규명과 재조명 작업이 더 이상 늦춰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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