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反지성주의 언제까지 설칠 것인가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박혜수의 전지적 시점]

박혜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7-21 09:17:15

남들처럼 여행을 해 본 적도 없고 지금도 책상에서 책상으로 옮겨 다니는, 단조롭고 누추한 삶을 살고 있지만 여행 대신 가끔 기행문을 읽는다. 글을 쓴 사람이 이끄는 대로 그의 시각을 통해 낯선 곳으로 떠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가 쓴 ‘일곱 개의 자전거 여행’도 그런 기행문 가운데 하나다. 자전거도 탈 줄 모르고, 더구나 자전거 여행 같은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지만 자갈길 위로 가랑비가 내리는 오후, 비를 피해 커피 집에 들어간 작가의 곁에 잠시 함께 앉아 보는 기쁨, 그가 읽어 주는 풍경 속으로 침잠해 갈 때의 나지막한 설렘, 작가와 함께 오래 전 그가 지났던 길을 다시 더듬어 가며 그의 상념을 감싸는 추억에 귀 기울일 때 서서히 차오르는 동질감… 이런 것들이 일상의 일들로 지친 마음을 치유해 준다.

책에는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어구스틴 바리오스 망고레가 등장한다. 대위법 등의 기법을 작곡에 사용해 ‘남아메리카의 바하’로 불리기도 하고 ‘기타의 파가니니’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평생을 홀로 떠돌며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에는 대체로 비 오는 저녁의 램프 불빛과도 같은 아련한 정취가 배어 있다. 그 정취가 값싼 센티멘털리즘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그 바탕을 이루는 인문학적 정서 때문일 것이다. 바리오스 망고레는 “연주자가 곡을 해석하고 연주하는 데는 ‘인문학적 배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바리오스 망고레를 아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 가운데 ‘훌리아 플로리다’라는 아름다운 곡이 있다. 제목을 보면 아름다운 한 사람을 그린 곡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듣다 보면 음정과 박자 하나하나에 담긴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리고 그 음률이 지극히 맑고 단정하면서도 에로틱한 여운을 남긴다. 얼마 전에 본 한 유럽 영화의 여주인공 대사 가운데 “지적이고 마음이 착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가 만든 음률의 빛깔로 미루어 보아 바리오스 망고레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이 지적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인문학적 소양이다. 박사학위를 서너 개 갖고 있다 해도 인문학적 정서가 결여된 지식은 값싼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수학은 저 자신의 편견과 한계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고, 일반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또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일입니다. …수학은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을 받은 허준이 박사가 수상 소감에서 밝힌 생각이다. 그동안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접어 두었던 부분, 그 그늘이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인문학적 감성,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강조했던 반(反)지성주의를 이길 힘이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특별히 강조한 말들 가운데 하나다. 이 말은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만들어 낸 것으로, 집단적 사고를 통한 편 가르기와 반대 세력 악마화 등이 만연했던 1950년 무렵 미국의 극우 매카시즘을 비난하는 용어였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선 극우 매카시즘 대신 좌파 성향의 정치인들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문재인정부의 지난 5년간, 심지어 정권이 바뀐 최근에조차 극우가 아닌 좌파의 행동 트렌드에 만연해 있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다.

대선과 지선, 두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 더불어민주당은 지금 약이 올라 분풀이 중이다. 출범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새 정부에 대해 ‘인사 폭망’ ‘경험 부족·무능’의 프레임을 덮어씌우고 좌파 성향의 언론을 동원해 여론전을 펼친다.

심지어 대통령 부인에 대해서는 옛이야기 속의 뺑덕어멈이 수군거리고 다녔을 법한 말들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굳히기에 여념이 없다. 대통령 부인이기에 앞서 한 인간이고 남의 아내다. 한 사람을 발가벗겨 광장에 세워 놓고 모욕과 저주를 퍼붓는 것과 다름없는 그 행태들이 과연 정당하단 말인가. 두 번의 선거 패배가 국민이 자신들의 반지성을 혐오한 결과라는 사실을 민주당에서는 정말 모르는 걸까….

‘일곱 개의 자전거 여행’을 쓴 일본 작가는 바리오스 망고레와 함께, 그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일본 열도의 북쪽 지방을 홀로 자전거를 타고 여행한다. 열정 없는 성실함, 반지성적 행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삶이 삶답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시간의 길이 이상의 것,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지적 감성이 필요하다. ‘일곱 개의 자전거 여행’에 이런 말이 나온다.

“추억이 과거의 시간을 향해 뻗어 가는 감정의 선이라면, 마음속에 현실과 평행을 이루며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그 세계가 착하고 따뜻하다면, 그런 사람들을 만나 욕심 없는 자전거 여행을 하듯 어울려 살고 싶다.

박혜수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