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릉 
전주 
)
20세기 현대미술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헤친 한스 제들마이어가 현대미술의 현상을 이렇게 집약하고 있다. 순수성, 기술, 광기, 근원. 물론 현대미술은 예술의 혼란이며 반휴머니즘, 즉 ‘중심의 상실’로 내몰리고 있다.
그렇게 비판을 받는 현대미술은 지금 아방가르드에서 보듯 열정과 진지함만큼은 평가받을 부분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광기니 순수성이니 하는 떠들썩한 제스추어 같은 것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오히려 지난 20세기 아방가르드의 객기 섞인 열정이 그리워지고 있다.
현재 급속한 기술적 진보를 보인 미디어는 자극적인 정보 외에는 어떤 것도 가차 없이 무력화시키는 괴력을 소유하고 있다. 지금은 누가 뭐래도 미디어가 대세인 시대다. 미디어의 하이퍼리얼 혹은 초감각적 가상 이미지의 시대이다 보니 7,80년대의 팝아트도 먼 과거의 고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미학적 혼란기에 처할 때마다 복고의 충동은 필연적이다. 한쪽으로는 미디어의 자극적 세계에 열광하면서도 고전적인 중후함이나 진지함을 희구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코엑스에서 있었던 ‘2022 코리아 아트페어’에 들렀을 때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아트페어가 전국적으로 워낙 많고, 또한 어느 정도 노출된 작가들이 반복적으로 혹은 겹치기로 나오다 보니 이제는 특별한 차별성을 느끼기 어려워진 상태다. 대체로 개별 작가들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나 관람자들의 동태와 성향 같은 것들을 더 관심있게 지켜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떤 작가의 부스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바로 이용재 작가의 부스다. 다름 아닌 벽에다 바로 선묘를 한 듯한 작품인데, 유심히 보니 구리 동선으로 인물 드로잉을 하여 벽에 설치를 한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인물을 재현한 단조로운 드로잉 자체가 아트페어라니 웬일인가 싶어 모인 관람자들이 다시 가까이 다가가 그것이 입체적 동선으로 이루어진 것에 경이로워하는 것이었다.
그의 작업은 구리 철사를 마치 코일링하듯 돌려가면서 주로 인물을 재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선 한 가닥으로 시작하여 어두운 부분에서는 코일링의 밀도가 조밀하게 높아지고 밝은 부분에서는 간격이 뜸해지는 것이 흡사 펜화를 연상케 한다.
다른 점이라면 펜화는 주로 선분이 반복되거나 교차되면서 명암이 표현되는 것과 달리 동선을 감아 가면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손으로 선을 면밀하게 신중하게 움직여 가면서 묘사를 수행하며 다시 선의 움직임을 따라 산소용접을 섬세하게 함으로써 완성해 나가는 방식이다.
여러 과정들이 공을 들이고 집중해야 하는 것들로, 표현의 완성도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드로잉 같은 소묘조차도 컴퓨터 같은 장치들에 의존해야 하는 오늘의 환경에서 손을 이용한 것으로서의 희소성에다, 흔히 보기 어려운 입체적 선을 사용한 난이도 높은 재현의 성취라는 점에서 관람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렇듯 매혹적인 드로잉만으로도 관람자들에게서 경이로운 반응을 얻기에 충분하지만, 작가는 재현 그 자체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공간 연출은 물론 벽과의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여 빛을 받으면 그림자가 나타난다. 선묘 다음에 마치 옅은 담묵(淡墨)으로 담채를 한 것 같은 연출을 곁들여 여운이 넘치는 느낌을 펼치는 것이다. 특히 드로잉된 인물 이미지들을 벽에 올려 마치 연극 무대 같은 상황의 미장센 효과로 모종의 서사를 부여한다.
두 인물이 서로 마주 보며 핏대를 올리는 장면의 작품(AAA......_가변설치,혼합매체, 2018)은 작가의 대표작이다. 분명 동일한 언어, 동일한 문법의 메시지를 발신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답답한 사회현상을 질타하는 비판적 작업이다. 사회구성원들 속에서 선입견이나 상이한 이데올로기, 상이한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불통현상은 바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은 회화적 재능에 조각가로서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결합되어 일구고 있는 성취들이다. 작가는 날이 갈수록 미디어를 비롯한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는 오늘의 경향들과는 전혀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조각가로서 오랜 물질적 재료들과의 교감 그 자체에서 조형의 본질을 발견한 작가이다. 바로 그런 교감의 가치를 얻기까지는 적지 않은 세월이 걸렸다.
작가는 순간의 만족, 말초적 감각의 만족을 위한 작업보다는 보다 오래 지속 가능한 미감의 작업을 천성적으로 원했던 것이다. 더러는 고집스럽고 타협이 없는 작가정신 자체가 요즘의 시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다양성의 시대에 취미 또한 한결같지는 않다. 어떤 패러다임이나 트렌드가 지배하고 있지만 개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는 각기 다르다. 오늘날 미디어를 비롯한 다양한 미적 추구와 시도들 속에서 어떤 복고나 반동의 에너지는 그리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와 예술 생태계의 건강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복고나 반동, 저항은 필요하다.
이 시대는 이상을 추구하는 고전적 입장이 오히려 아방가르드 같은 인상을 준다. 인스턴트를 지나치게 많이 섭취한 우리의 미각이 집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자신의 혼과 열정을 바친 중후하고 깊이 있는 작품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할까, 은자처럼 작업에만 정진해 온 작가의 재능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세월 기량을 연마해 온 작가의 작업이 건조한 화단에 드디어 따뜻하고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대하역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