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장군의 패를 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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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수의 전지적 시점]

지금은 장군의 패를 써야 할 때다

박혜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7-28 09:35:57

오래 전 영화인데 요즘 보아도 구태스럽지 않은 것들이 있다.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1986년 작품 ‘듀엣 포 원’도 그런 영화다. 영화는 세계 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주인공 스테파니가 런던 필하모닉과의 공연을 앞두고 손가락에 마비가 오면서 시작된다. 스테파니는 결국 연주를 못하게 된 것은 물론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남편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고 아끼던 제자는 미국으로 떠나 버린다. 이어서 평생을 함께해 온 반주자마저 세상을 떠나자 홀로 남겨진 스테파니는 절망한다….

스테파니 역의 줄리 앤드류스는 이 영화로 1987년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속의 수많은 말없음표, 슬픔의 자국이 묻어나는 미소를 짓는 그녀의 표정 연기에선 젊은 배우는 흉내 내지 못할 특별한 기품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줄리 앤드류스가 이렇게 괜찮은 배우였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훌륭한 연기와 함께 영화에 매력을 더하는 것은 음악이다. 영화에 클래식 곡이 쓰인 경우는 많지만 이 영화는 특히 음악의 선곡에 성공한 것 같다. 스토리와 음악이 하나가 되어 클래식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선율에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어 버린다.

영화의 첫 부분에선 바하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 나온다. 바하 작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곡 중 하나로 꼽히는 이 곡은 피아노 버전으로 연주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바이올린은 예후디 메뉴힌과 크리스티안 페라스의 연주, 피아노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어눌한 듯 맑고 단정한 연주로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다.

바하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이어 등장하는 곡이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다. 영화 전체를 이 한 곡이 끌고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음악이 흐르는 순간 휘몰리듯 공감이 증폭된다. 특히 언덕 위 느릅나무 밑에 홀로 선 스테파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이 서서히 올라가며 화면이 암전될 때까지 부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악장’이 줄곧 이어지는 영화 끝 부분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한 것을 음악이 말없이 한꺼번에 들려주는 느낌이다.

▲ 야샤 하이페츠가 연주한 '브루흐의 바이올린렵주곡 1번' 음반.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 명반 중의 하나로 꼽힌다.

부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명곡이다. 여러 연주자가 연주했고 누구의 연주가 최고인지에 대해 의견도 분분하다. 하지만 이 곡에 대해서는 하이페츠를 따라갈 연주자가 없는 것 같다. 들어 보면 같은 곡인데 연주자에 따라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똑같은 멜로디를 가지고 박자와 속도, 텐션을 주는 부분을 달리해서 빚어지는 차이 때문이다. 구현된 연주를 통해 연주자의 느낌과 생각을 읽어 가는 재미도 그 차이에서 비롯된다.

음악을 들을 때나 사람이나 일을 판단할 때나 소요되는 기본 시간이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면 결과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뻗어 가기도 한다. 옛날 공자는 성급한 판단으로 제자인 자우에게 실수를 한 다음 “사람을 볼 때는 ‘시(視)’가 아닌 ‘관(觀)’과 ‘찰(察)’의 관점으로 살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천천히, 깊이 살피라는 얘기다.

요즘 거의 날마다 각종 언론들에서 대통령 지지율을 놓고 부정평가가 높아지는 가운데 긍정평가는 하락을 멈췄다고 떠들고 있다. 지난 정부의 누적된 과오와 우크라이나 전쟁, 금리인상 등 최악의 조건에서 출범한 정부다. 어떻게 수습하고 헤쳐 갈지 성급한 판단에 앞서 지금은 지켜볼 때다. 일에는 순서가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에게는 품격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다. 기품 있는 존재들의 공통된 특징은 ‘너그러움’과 ‘침착함’이다. 혹시 지금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결여돼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정부에서도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정부에 대한 부정평가가 야당의 프레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기대하고 맡긴 만큼 지켜보는 시선도 엄중하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조세 감면 등의 단편적 방책뿐 아니라 여러 난제 극복과 민생을 살리기 위한 앞으로 5년간의 상세한 청사진, 희망이다.

중장기 플랜을 짜는 게 어려운 일 같아도 사실 머리 좀 돌아가는 전략가 몇 명이면 한 달 안에 너끈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에선 꼬투리 잡기에 혈안이 된 기자들 앞의 대통령 말고는 별로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 누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고 답답하다. 장관이나 대통령실 실무자들이 너무 안 설치는 것도 문제다. 그것이 국민을 답답하게 하고 실망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챙겨 봐야 할 것이다. 국민이 명한다. 정부는 앞으로 한 달 안에 민생을 위한 상세 플랜을 만들어 국민 앞에 프레젠테이션 하라. 플랜이 약속이 되어 발목 잡힐까 두려워 말라. 지금은 장군의 패를 써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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