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에도 맹장염 수술이 가능하길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기자수첩

[데일리 Talk] - 국내 필수 의료체계 붕괴 위기

김기찬 기자페이지 + 입력 2022-08-18 00:02:30

2020년 11월 맹장염으로도 불리는 급성 충수염으로 한바탕 난리를 겪은 바 있다. 당시에는 통증이 심하지 않아 가볍게 얹힌 거라 생각해 병원에 가지 않고 소화제를 복용하면서 며칠 방치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터져 버린 맹장으로 생애 처음 응급실을 찾게 됐다. CT(컴퓨터단층촬영) 결과 맹장염이 악화돼 국소적인 복막염으로까지 번진 상태였다.

당시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맹장염으로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번질 경우 최대 사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응급상황이라고 했다. 이에 의료진의 발 빠른 대처로 2차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수술 직전 기억을 되짚어 보면 '응급'이라는 설명에 조급해 하던 기자와 달리 수술을 담당한 의사는 별 거 아니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이미 복막염으로 번져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의료진 입장에서는 맹장염 수술 자체가 거의 시술 수준의 간단한 수술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맹장 수술도 앞으로는 받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된다. 대한외과학회는 10여년 전부터 의사들의 외과 지원이 갈수록 줄어들어 맹장 수술조차 진행할 외과 전문의가 부족해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10년 후부터는 아예 전문의가 모자라 맹장수술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암울한 관측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의사 부족’으로 간단한 수술조차 진행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달 24일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하던 30대 간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졌으나 사건 당시 수술을 집도할 의사가 없어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하다 골든타임을 놓쳤고, 결국 세상을 등져야만 했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의사 부족은 예전부터 통계를 통해 줄곧 지적돼 온 문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000명당 임상 의사 수는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7명)보다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2020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전문과목별 자격인정 전문의 수 증가율은 연평균 3.64명이지만 필수 의료 분야라 불리는 외과는 1.85명, 흉부외과는 1.83명, 산부인과는 1.33명에 그쳐 의사 부족 현상이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이에 정부는 아산병원 사태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8일 필수 의료 과목 전문가들과 정책 간담회를 개최하며 대책 마련에 나섰다. 보건복지부 내에 ‘필수의료지원 전담조직(TF)’을 신설하고 필수의료 수가 조정, 중증응급환자 중심 전달체계 개편, 전문 과목 세분화 등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2차관은 필수의료 인력 및 관련 인프라를 확충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다만 의료계에서는 의료 인력 확충이 능사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래전부터 피부과·성형외과 등 이른바 수입 좋은 인기과목에 전공의가 쏠리면서도 필수의료 과목으로 꼽히는 외과·산부인과 등에 지원하는 전공의는 점차 줄어 ‘양적 의료진 확충’은 해법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에 의료계는 정원이나 수가 등 개별적인 사안보다는 고위험·고난도 의료행위 기피 현상, 의료 상업화, 의료 시스템 왜곡, 진료과목 불균형 등 종합적인 관점에서 필수 의료 분야의 자생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의 주장처럼 의료계 깊숙이 곪아 있는 의사 부족이라는 ‘염증’은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번지듯 아산병원 사태를 예시하며 ‘응급 신호’를 보내고 있다. 복막염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염증이듯 국내 필수 의료체계도 의사 부족으로 간단한 수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붕괴를 앞둔 위급상황임이 분명해 보인다.

정부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엄중히 인식해 의사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감하고도 획기적인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신속하면서도 올바른 '정책 수술'로 10년 후에도 맹장염 수술을 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김기찬 gckim@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