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더듬증 유명 골퍼 구스타프손의 인생 2막은 캐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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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 기피증으로 필드만이 유일한 안식처
프로 데뷔 19년 만에 처음 인터뷰 갖기도
딸뻘 후배 캐디백 메고 올해 3승째 거둬

박병헌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8-25 09:09:38

스웨덴 출신의 소피 구스타프손은 호쾌한 장타를 앞세워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여자 골프의 한 시절을 풍미한 특급스타였다. 3년 선배로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무려 72승을 거둔 ‘여자골프의 전설’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의 그늘에 가렸지만 구스타프손은 LPGA 투어에서 5승, 유럽여자투어(LET)에서 16승을 거둔 스타였다.

178cm의 큰 체격에 특유의 파워를 앞세운 그는 1998년 LPGA에 데뷔할 때부터 2015년 은퇴할 때까지 늘 드라이버 비거리 부문 1,2위를 다툰 장타자였다. 그의 드라이버 샷은 평균 270야드를 넘나들었다.

남과 대화 필요없는 골프에만 집중

어려서부터 두 오빠들과 축구·테니스·피겨 스케이팅을 즐겨했던 구사타프손은 10살 때 집 근처에 9홀 규모의 골프 코스가 생겨난 게 인생을 180도로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심각한 말더듬증으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그에게는 필드가 곧 유일한 안식처였다. 남들과 별로 대화할 필요 없이 자신의 샷과 플레이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게 골프였다. 골프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운동을 그만두었고 이후 골프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음에도 국내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채 18살 때 프로로 전향했다. 1996년 6월 LET투어 데쎄 스위스 여자오픈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하면서 큰 자신감을 얻은 구스타프손은 무대를 LPGA투어로 옮겼다.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하고 큰 명예를 얻기 위해서였다.

2년 만에 LPGA투어 칙필 A 채리티 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을 하고 정상권에 들었지만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심각한 말더듬증으로 대인기피 증세가 유독 심했기 때문에 각종 미디어의 인터뷰를 거절하는 등 언론에 노출되는 걸 꺼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벙어리라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다.

말더듬증이 심해서 언어치료를 받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LPGA투어에서 17년간 활약하는 동안 4차례의 연장전에서 모두 패한 것은 건장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소심하고 멘탈이 약하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필드에서 새로운 역할 하고파 캐디 나서

구스타프손이 2011년 미국과 유럽의 골프 대항전인 솔하임컵에서 프로 데뷔 19년 만에 처음으로 했던 언론 인터뷰는 감동적인 인터뷰로 남아 있다. 늘 마음을 닫고 살았던 그가 용기를 내어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 보고 싶어 먼저 방송국에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었다.

기자도 카메라맨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카메라를 향해 힘겹게 인터뷰한 모습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70분을 녹화했건만 말을 더듬은 부분을 잘라낸 결과 3분가량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말더듬증세가 의외로 심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터뷰에는 “필드는 유일한 안식처이며 이곳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고 싶다”는 그의 소망 사항이 담겼다. 더구나 미모 또한 빼어난 구스타프손은 LPGA투어 전 커미셔너인 타이 보토(미국)와 결혼했지만 4년 만에 이혼하면서 상실감이 컸던 차였다.

명성에 흠된다는 주변의 만류 뿌리쳐

그는 2015년 전격적으로 선수에서 캐디로 직업을 바꿨다. 중국에서 열린 LET투어에서 나란히 컷 탈락한 베스 앨런(미국)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캐디 백을 메기로 한 것이다.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는 약속을 지켰다. 이후 선수로서 은퇴를 한 뒤 지금까지 캐디로서 필드를 지켜 오고 있다.

기량이 떨어져 경기에 나갈 수 없는 수준이 돼 버린 그가 필드에 서는 유일한 길은 캐디였다. 25kg에 육박하는 캐디 백을 메고 하루 평균 8km 이상의 오르막 내리막 길을 걷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형편도 전혀 아니었다. LPGA투어 우승자로서 명성에 흠이 간다며 말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체면 따위는 아랑곳 없었다.

투어 경험으로 우승 합작… 또 다른 성취감

구스타프손의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최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LET 투어는 국내에서 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영국 북아일랜드 앤트림에서 LPGA투어와 LET투어가 공동 주관한 대회인 ISPS 한다 월드 인비테이셔널에서 그는 딸뻘 되는 조국의 후배 마야 스타르크의 캐디 백을 메고 역전 우승을 일궈 냈다.

우승을 결정 지은 뒤 그린 위에서 서로 포옹하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선수 때와는 또 다른 성취감을 이뤘을 게다. 프로 2년차인 스타르크는 구스타프손과 호흡을 맞춰 올해 3승을 거뒀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구스타프손의 투어 경험이 스타르크의 우승에 원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스타르크가 내년에 LPGA 투어에 데뷔하면 구스타프손은 캐디로서 20여년 전의 추억과 회한이 담긴 코스를 또다시 누비는 감회와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록 언어장애를 갖고 있지만 하고픈 일을 하며 그린 위에서 안식감을 만끽하는 그가 행복한 인생 2막을 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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