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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황엔 내가 형을 돕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그렇대도 할 수 없지. 다만 그런 순간이 생기지 않길 바라야지. 진욱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일찍 왔네? 아직 12시도 안 됐는데.”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 여경이 서 있었다.
“현관 패스워드 알고 있지만 막 들어올 수는 없잖아. 잘했지?”
이미 혀가 꼬여 있는 여경은 제집에 들어온 듯 와인셀러를 활짝 열더니 한 병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와인잔 랙에서 잔을 두 개 빼내 가져다 놓고 싱크대 서랍을 열어 오프너를 찾아냈다.
진욱이 처음 여경을 만났을 때는 그런 거침없는 행동과 언사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남들을 대할 때만이 아니라 남들이 자신을 대할 때도 예의 같은 걸 따지지 않는 시원시원한 매력이 있었다.
어떤 경우든 여경에겐 부연 설명 같은 게 필요 없었다. 중요한 내용만 전달되면 다른 수식어는 생략되어도 좋았다.
그랬다 처음엔. 인형 같은 외모에 그런 소탈함이 한편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그게 또 다른 매력 포인트였다. 하지만 딱 몇 달간이었다.
뉴욕 파견 근무 시절 공원 산책을 하다 심하게 다친 강아지를 본 적이 있었다. 큰 동물에게 공격당한 듯 피 흘리며 비틀거리는 작은 강아지였다.
“하지 마, 진욱 씨. 하지 말라고!”
놀라 다가가는 진욱의 옷을 여경이 확 잡아끌며 소리쳤다. 겨우 한두 달이 지났을까 싶은 강아지라 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먼저 몸을 낮추고 강아지를 살펴줄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다.
“저런 강아지를 왜? 구질구질한 일은 딱 질색이야. 제발 그러지 마.”
여경은 강아지를 향해 큰 소리로 발을 굴렀다. 놀란 강아지가 안간힘으로 길 쪽으로 달아났다. 그 모습을 본 누군가가 애처로움에 소리를 지르고 주변 사람들이 달려들어 강아지를 안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나중에 진욱이 여경에게 물었었다. 그때 그 강아지를 왜 내쳤었는지.
“측은지심이 없었던 건 아니야. 내 산책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어.”
진욱은 충격을 받았다. 오로지 모든 세상의 정중심에 자신을 대입해야만 하는 여경의 삶의 방식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점점 두 사람 사이에 괴리가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인 것 같아.”
혼자서 와인을 마시던 여경이 다른 잔에 술을 부어 진욱의 책상 옆으로 다가왔다.
“오늘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
그러니 그만 돌아가 줘, 라는 의미를 못 알아챌 여경이 아니었다.
“난 이렇게 나약한 당신이 싫었어. 그렇지만 우리, 다시 잘해 봐. 아빠 성공에 우리 같이 매달려서 승승장구하자.”
여경이 와인 잔을 든 채 진욱의 목을 감싸 안았다. 와인이 바닥으로 주르르 쏟아졌다. 수건으로 바닥의 와인을 닦으려 몸을 굽히던 진욱의 눈으로, 책상 아래 매달린 단추처럼 작은 도청기가 들어왔다.
[글: 이경희 / 그림: 도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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