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운명’ 살다 간 가을 시인 폴 베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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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가 찾아간 곳은 아르덴 쥐니빌
리옹도르 여관은 그의 추억 깃든 베를렌 뮤지엄으로 재탄생

최인숙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9-13 09:22:49

“가을날

비올롱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우수로

내 맘 아파라

때를 알리는 종소리에

답답하고 가슴 아파, 지난날을 추억하며

눈물 흘리네

이제 나는 가리

모진 바람 휘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떠도는 낙엽처럼.”

9월이면 절로 생각나는 시 한수다. “가을의 노래.” 프랑스의 시인 폴 베를렌이 사랑한 여인에게 바친 구슬픈 시. 유연하고 음악적인, 그리고 우수 어린 운율이 돋보인다. 베를렌은 들뜨고 떨리는 호흡과 섬세하고 선정적인 감각을 현실에 녹여 순수하게 표현한 언어의 마술사였다. 이런 베를렌의 언어는 인상파 화가들뿐 아니라 포레·드뷔시와 같은 고전 음악가들, 그리고 샹송가수 세르주 갱스부르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운명적 시인, 그 길을 거부하지 못한 베를렌

불멸의 시인 베를렌. 그는 1844년 3월 프랑스 북동부 메츠의 쁘띠 부르주아지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 파리로 이사 오면서였다. 하지만 그는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가세가 기울자 그는 대학을 중퇴했고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직장은 그를 전혀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베를렌은 몽마르트르의 문학서클과 고답파 시인들을 찾아다녔다. 이때 보들레르와 고티에, 방빌을 만났다.

베를렌은 특히 보들레르에게 매료됐다. 이는 그의 시작 활동을 계속하게 했다. 스무 살 때 부르주아지를 풍자한 ‘미스터 프뤼돔’을 발표했으나, 그가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스물두 살 때 ‘사트루누스의 시들’을 모아 시집을 발간하면서였다. 그리고 3년 뒤 18세기 앙뚜완 와또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우아한 축제’를 발간해 큰 주목을 받았다. 베를렌은 보들레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이미 자신의 독특한 운율을 선보이고 있었다.

한편, 베를렌의 어머니 엘리자-스테파니는 외동아들이 시인의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베를렌이 파리의 보헤미안들과 어울리지 않게 하려고 26살 때 마틸드 모테를 중매해 결혼시켰다. 그러나 베를렌은 시인의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사건에 휘말린 베를렌, 인생의 소용돌이 속을 헤매다

신은 촉망받는 시인을 시기한 걸까. 젊은 베를렌은 뜻밖의 사건으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1870년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베를렌은 국민군이 돼 전투에 참가했다. 1년 후 1871년 베를렌은 파리시민과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파리코뮌을 지지했다. 유연하고 감성적인 시를 쓰는 베를렌이었지만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의 사도였다. 이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천재시인 아르튀르 랭보를 만났다. 열 살 연하였던 랭보는 자신이 쓴 시들을 베를렌에게 소포로 부쳤고 이를 본 베를렌은 랭보의 천재성에 그만 매료당했다. 이들은 곧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이 와중에 베를렌은 파리코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베르사유궁의 압력을 받아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이때 랭보와 함께 외국으로 피신했다. 2년간 이들은 런던과 브뤼셀로 광란의 질주를 벌였다. 그러던 1873년 베를렌은 랭보에 대한 질투와 절망으로 술에 취해 그만 총을 발사했다. 탄알은 랭보의 왼쪽 손을 스쳤다. 이로 인해 베를렌은 2년간 벨기에 몽스 감옥에 수감됐다.

허전한 맘을 달래러 그가 떠난 곳은 아르덴 쥐니빌

몽스에서 나온 베를렌은 가정교사를 하는 랭보를 보러 슈투트가르트로 갔다. 이 만남은 영원한 이별이 됐다. 그 후 베를렌은 교도소에서 쓴 시들을 발표했다. 큰 반향을 일으켰고 유명해졌다. 하지만 허전한 맘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는 정처 없이 아르덴 지방으로 떠났다. 어머니가 소유하고 있는 쥐니빌의 농장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아르덴 입구에 있는 쥐니빌은 레텔에서 15km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랭보의 고향 샤를르 메지에르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이 마을은 라 르투룬 천이 흐르고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져 살기 좋고 문화재가 많다. 베를렌은 1880년부터 1882년까지 이곳에 집 한 채를 얻어 살았다. 리옹도르 여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이 집에서 그는 시를 쓰고 요리를 했다. 여기서 그는 시집 ‘지혜’를 완성했다. 여기엔 랭보와 스테판 말라르메, 트리스탕 코르비에르의 시들이 들어 있다. 이 모음집 서문에서 베를렌은 랭보를 잊지 못하고 ‘시인 중의 거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베를렌의 추억이 가득 담긴 리옹도르 여관. 지금은 베를렌 뮤지엄으로 변신해 ‘저명한 사람들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여기엔 베를렌의 다음 말이 남아 있다. “나는 쥐니빌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기지개를 켰다. 나는 여기에 내 운명의 조각들을 남기고 오래 살았다.”

베를렌의 안식처가 된 쥐니빌. 베를렌은 2년 후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아들을 잃었다.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25편의 시가 담긴 시집 ‘아무르(사랑)’를 집필해 새로운 명성을 얻었다. ‘시인들의 왕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만난다. 그럴 땐 폴 베를렌의 시 한편을 읽고 안식을 찾아 보자. 만약 시보다 더한 처방전이 필요하다면 베를렌이 역경 속에서 쥐니빌을 찾았던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쥐니빌’을 찾아 떠나 보라. 다시 인생을 끌어 갈 에너지를 조금은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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