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역사 더 가르치면 무슨 소용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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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의 청담유감(有感)

‘자유’ ‘남침’ 삭제 바로잡히겠지만 힘든 싸움
좌파 득세하고 정치 투쟁의 장으로 활용 중
근현대사 교육 강화보다 '제대로'가 먼저다

홍찬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9-14 10:58:00

한국사 교과서를 놓고 다시 논쟁이 불붙었다. 교과서 집필의 기준이 되는 ‘교육과정’ 시안(試案)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가 빠지고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에서 ‘남침으로 시작된’이 사라졌다. 문재인 정권 때 해 놓은 일이다. 이제 우파 정권으로 교체된 마당에 ‘교과과정’ 가운데 잘못된 부분은 어떻게든 바로잡힐 것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상황은 우파 세력에게 그리 녹록지 않다.

한국 교과서는 검정 제도를 택하고 있다. 그 취지상, 교과서 집필은 어디까지나 자율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 참여 교수와 교사들이 어떻게 내용을 서술하느냐에 따라 근현대사 교육이 좌우되는 구조다.

그런데 한국사 가운데 근현대사 분야는 좌파 학계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동안 근현대사 교과서의 좌편향 서술이 번번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던 배경이다. 다만 교육당국이 사전에 정해 놓는 집필 기준이라는 것이 견제 장치로서 존재하지만 이마저도 문재인 정권을 거치면서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특히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내용의 75%가 근현대사다. 고교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사를 배우지만 근현대사는 이 시기에 처음 접하게 된다. 새하얀 눈에 덮인 순수의 들판과 같은 이들의 뇌리에 어떤 시각이 자리 잡느냐에 따라 개인은 물론 국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우파 정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바로 잡으려고 했지만 좌파 세력의 철통 방어를 넘어서지 못했다. 교학사가 출간한 한국사 교과서가 편향적인 역사 서술과 해석을 정상화해 보겠다며 나섰으나 왕따를 당하며 좌초하기도 했다.

좌파 세력의 ‘총력 사수’는 근현대사 교육을 효과 만점의 정치 수단으로 보고 있는 데 기인한다. 단적인 예로 학교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를 많이 가르칠수록 좌파에게 유리하다. 이 분야도 결국 진리를 존중하는 학문의 영역일 텐데도 합리적 사고와 표현의 자유가 사라진 반(反)지성의 세계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다른 관점을 제시하면 바로 ‘친일’로 몰리기 때문이다.

이런 판에서는 ‘독점 공급자’인 근현대사 학계 마음대로다. 이번 ‘교육과정’ 시안을 만든 어떤 교수처럼 유관순은 깎아 내리고 김원봉은 치켜세워도 대다수 국민은 전문 지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인다. 교과서에 뭘 넣고 뭘 뺄지를 그들이 정한다. 오죽하면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는 역사’라는 책 제목까지 나왔을까.

학생들이 민주화 역사를 배울 때도 국내 정파 중 어느 쪽이 좋아할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우파에게 유리한 근현대사 분야로 산업화 역사가 있긴 하다. 가난을 극복한 산업화의 이미지로는 ‘부지런하고 엄한 아버지들’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들은 예전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때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반면에 민주화에 대한 서사는 감성적이고 즉각적이다. 전체 구도가 원래부터 그렇게 기울어져 있다고 쳐도 교육에서 최소한의 균형 감각은 확보되어야 하는데 그게 무너져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였고 이념 대립이 심했던 독일에는 ‘보이텔스바흐 합의’라는 게 있다. 교실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추구하기 위해 오랜 고민 끝에 나온 원칙이다. 이 원칙의 첫째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특정한 의견을 강요하거나 특정한 의견을 근거로 학생들을 제압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논쟁적인 사안을 다룰 때는 다양한 주장을 학생들에게 알려 줘 그 논쟁이 교실 안에서 재현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학생들이 제3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토대로 정치적 쟁점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의 현실에 이 원칙들을 적용시켜 보자.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자는 일각의 주장은 한국 사회에 자유민주주의 말고 다른 체제를 도모하려는 그들의 ‘원대한 꿈’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고 더 경직적인 체제일 수도 있다. 북한의 ‘남침’이라는 단어를 그토록 회피하며 북한을 감싸는 것도 큰 틀에서 같은 의도다. 이 점만 보아도 정치적 중립은커녕 학생들에게 특정 의견을 강요하려는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교실에서 다양한 관점이 폭넓게 제시되어야 하는 원칙 역시 현재의 여건에서는 과연 지켜질지 회의적이다. 선진국에서 당연시되는 원칙이 한국에서 자리 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최근 나타나고 있는 한국사 교육 강화 움직임이다. 수능시험에서 한국사는 필수과목이 됐다. 취업 등에서 중요해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지난해 응시자가 51만 명으로 수능 응시자 수를 넘어서면서 확산의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수능 한국사 과목에서 근현대사 비중은 전체의 75%,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근현대사 비중이 40%를 차지한다.

제대로 된 근현대사 교육이라면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역사 교육이 정상 궤도를 이탈한 상황에서는 교육 강화가 반드시 능사는 아니다. 딜레마에 빠진 이 문제를 어찌해야 할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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