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여왕의 온화한 미소에 담겨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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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의 청담유감(有感)

‘아우라’로 불렸던 문화 자본의 축적된 힘
시대 변화로 문화 감수성이 크게 중요해져
일부 계층의 전유물 안 되도록 대응 시급

홍찬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9-28 09:52:04

‘여왕에게는 아우라가 있다.’ 2015년 6월 독일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 대해 독일의 유력 신문인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이 평가한 말이다. ‘아우라’는 원래 예술작품에서 느껴지는 고상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뜻하는 문화 용어다.

정말 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누구라도 친근감을 갖게 만드는 온화하고 여유로운 미소, 세련되고 위트 있는 화법 때문만은 아니다. 기품이라고 할까 위엄이라고 할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뭔가 특별한 것’을 ‘아우라’로 칭한 것이다.

70년을 재위한 ‘대영제국 군주’의 특수한 사례로 한정 짓지 말고 논의를 일반화해 볼 수도 있다. 주변에서 어떤 사람은 말투와 취향·예절 등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호감을 갖게 만드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는 ‘문화 자본’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결론 내린다.

이 개념은 난해한 학술 차원의 이슈만은 아니다. 문학 영화 등의 소재로도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 작)가 대표적이다. 주인공 일라이자는 길에서 꽃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하층 계급의 여성이다.

험한 세파로 그의 말투에는 거칠고 강한 억양과 투박한 언어가 배어 있고 얼굴 표정은 경직되어 있다. 음성학자인 히긴스 교수는 일라이자를 놓고 친구와 내기를 한다. 일라이자에게 상류층의 품위 있고 고상한 말투와 어휘를 가르쳐 6개월 안에 사교계의 귀부인처럼 만들겠다는 것이다.

결과는 관객이 내심 바라는 대로다. 일라이자는 ‘숙녀 수업’을 잘 소화해 완벽한 변신에 성공한다. 호화로운 파티에서 일라이자는 “혹시 헝가리 귀족이 아니냐”는 말을 들으며 최고의 성적표를 받아든다. 히긴스 교수는 내기에서 이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에도 시골 소년으로 갑자기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된 주인공이 런던으로 ‘신사 교육’을 받으러 가는 내용이 나온다. 줄리아 로버츠가 매춘부로 나오는 영화 ‘귀여운 여인’(1990년 작)에서도 주인공이 상류 사회의 테이블 예절을 부랴부랴 배우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이들이 필요로 하고 또 얻고자 했던 것들을 뭉뚱그린 게 바로 문화 자본이다. 해당 작품들 속에서는 대부분 뜻한 바를 이루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벽은 높고, 속성 과외로는 문화 자본이 취득되지 않는다.

문화 자본은 지식·교양·예술적 감식안·대화술·예의범절 등 주로 사람의 인격에 내재되어 있는 것들이다. 어릴 적부터 여러 문화적 체험이나 교육을 통해 꾸준히 쌓여 간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돋보이는 ‘아우라’는 문화 자본에다 왕의 권위가 갖고 있는 ‘상징 자본’이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그는 이에 관한 한, 단연 최고 수준에 올라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문화애호가였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남긴 글 가운데 이 문제를 다룬 것이 있다. ‘사람의 감수성은 타고 나는 것도 있지만 자라면서 듣고 보며 형성되는 것도 있다. 옆집 아저씨나 아줌마가 연주하는 동네 음악회를 보며 자란 아이와, 부모 손에 이끌려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공연을 보러가는 아이 중에서 누가 더 문화적 안목이 커질 지는 자명하다.’(이건희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1997년)

이런 문화적 격차는 과거 우리에게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 자본이 우리가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류 계급에서 세습되고 그들의 지위를 더 확고하게 만든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한국에서는 그럴 정도로 문화 수준이 높지 않았다. 문화예술이 사회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미미한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달라졌다. 문화적 상상력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경제적 능력과 직결되고 있다. 즉 문화 자본이 돈이 되고 지위가 되며 신분을 재생산하는 시대다. 문화예술 행사를 찾는 발길이 부쩍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 규모로 보면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와 경제력이 있는 계층은 아직 일부다. 대부분은 그날그날 살아가기에 바쁜 사람들이다.

따라서 문제는 전체의 대부분인 나머지 계층, 특히 청소년 세대에게 문화 자본을 갖추게 해 주는 일이다. 공동체 안에서 이 일이 소화되어야 한다. 학교 차원에서 박물관·미술관·공연장을 자주 데리고 가고 책을 읽히는 등 시대 변화에 맞는 대응에 나서야 한다. 지방의 문화 인프라도 절실하다. 돈 있는 부모를 둔 아이들이나 가능한 일을 보편화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답답한 것은 자칭 서민을 위한다는 세력이다. 이들이 정치적 이익을 노리고 무상 시리즈, 노동과 인권 교육 등에만 목청을 높일 때 슬며시 웃는 사람들은 따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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