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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룡은 한줄기씩 떠오르는 기억을 붙잡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도록 소선은 한참 방황을 했고 한참 후에야 명환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장에 여자를 담아 본 적이 없던 우룡이야 잊을 수 없는 여자로 소선이 피에 맺혔겠지만, 자유 영혼의 화가 소선이 자신 때문에 방황했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선은 오래 방황했고 그 마음을 다시 잡아보려고 명환이 고군분투 엄청난 정성을 쏟아부었다는 것을 우룡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우찬이 죽던 즈음 소선이 별장 옥상에 녹음기를 두었었다는 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카세트 테이프를 아직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별장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고 마음이 급해진 우룡은 결국 만삭인 소선을 거기에 부를 수밖에 없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소선은 주차를 하고 정원을 건너오며 흠뻑 젖은 우룡에게 따듯한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비가 와서 좋아.”
소선은 마트료시카 인형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무 물체도 없는 색만 가득한 그림이었다. 바람 같기도 하고 채색이 화려한 빗물 같기도 했다.
“나…, 서울 떠날 거야. 아기 태어나면 바로.”
소선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우룡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예전에 유학할 때 살았던 스튜디오 비워달라고 했어. 거기서 아기랑 그림만 그리면서 살 거야.
그 순간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명환 씨한테 아기까지 빚지게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무책임하니, 너희 여자들은!”
이미 화를 내기에도 늦었다는 걸 알지만 우룡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명환과 결혼 날짜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소선을 찾아갔었다. 자신은 이미 결혼하긴 했지만 소선이 영영 명환의 여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소선에게 애원했었다.
“여자들의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야.”
“명환이 안다는 말인가? 아이에 대해서도?”
소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우룡은 더이상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거실을 오가며 머리를 쥐어짰지만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도 아니고 프랑스에서 키운다는데, 밥벌이 걱정 안 해도 되는 유명 화가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 고맙기도 했다.
마음이 녹록해진 우룡은 소선의 손을 잡고 소선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넣어 선우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늦은 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들어보지 않았다면, 20개의 카세트 한 모서리에 새겨진 형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그 어떤 비극도 없이 은선우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을 것이었다.
[글: 이경희 / 그림: 도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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