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주 
)
하필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별장까지 가는 길은 익숙한 길이었지만 비 때문에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지고 있었다.
정원 한쪽에 차를 세우고 빗속을 뛰어 현관으로 들어섰다. 소선은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소선아. 나소선!”
소선은 얼른 일어서 미리 준비해 놓은 따듯한 수건을 우룡에게 건넸다. 배가 많이 불러 있었다.
“너 여기 안 올까 봐… 다시 못 볼까 봐… 걱정했어.”
우룡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덥석 잡았지만 소선은 슬며시 우룡에게서 손을 빼냈다.
“어서 머리 물기부터 닦아. 감기 걸리겠어.”
작고 여린 몸에 배가 한껏 부풀어 있었지만, 그조차도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세상 모든 시름을 잊고 이 여인과 손잡고 수풀 우거진 산골에 들어가 살아볼까 맘먹었던 때가 있었다. 치기 어린 시절이었었다.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사치였다.
우룡에겐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눈빛 초롱초롱한 딸아이 여경이 있었다. 아내 박선희를 위해 목숨을 걸진 않겠지만 여경을 위해선 목숨 아니라 모든 걸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룡은 마음을 다잡고 식탁에 앉았다. 소선은 여전히 기품이 있었다. 부른 배는 오히려 그 기품과 우아함에 경건함까지 갖도록 만들었다.
“이거….”
노곤함에 잠시 거실 창가에서 소선의 손을 잡은 채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새 소선이 가방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얇은 가죽 가방이었다. 손에 닿는 느낌에도 여러 개의 카세트테이프가 포장된 게 느껴졌다.
형이 죽은 날 이 별장의 옥상에 소선이 카세트 녹음기를 두었다는 걸 안 건 거의 1년이 다 된 일이지만 테이프가 별장에 있어 그것을 받는 게 쉽지 않았다.
바람 소리를 녹음하려고 둔 것이라 했다. 명환의 별장에 명환의 애인인 소선이 그 옥상에 무얼 두었든 상관없지만 우룡은 그것을 전혀 몰랐다.
형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장례를 치르고 그리움에 흐느껴 우는 모습에 소선이 혹시 음성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니 위로 차원에서 테이프를 찾아 준다고 한 것이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은 혼자 자살을 한 걸로 돼 있지만 사실 그 자리에는 우룡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 가면 아기랑 그림만 그리며 살 거야.”
소선은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살았던 스튜디오를 비워서 거기서 살겠다고 했다. 아기와 그림만 그리면서 살겠다고.
“좋은 그림으로 잘 살고 있다는 거 증명할 게. 우룡 씨는 우룡 씨의 자리에서 빛나는 사람이 되어 줘.”
좀 전까지만 해도 아기 손잡고 누워 둘의 이름으로 아기 이름을 지었었는데 우룡은 공연히 화가 나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모르게 옆의 인형 바구니를 차버렸다. 바구니에서 튀어나온 속을 텅 비운 마트료시카 인형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글: 이경희 / 그림: 도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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