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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룡은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고 방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우룡은 잠시 오해를 했다. 혹시 소선이 옥상에 두었다던 녹음기에 형 우찬과 자신이 나눈 대화가 녹음이 됐고, 소선이 그걸 듣게 돼서,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우연한 일이긴 했지만 형이 죽은 날짜를 소선이 정확하게 알게 되고, 옥상에 카세트테이프가 있다는 걸 말한 후 소선과 연락이 뜸해졌다.
정말 그 녹음테이프에 형 우찬의 목소리가 녹음이라도 되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선이 자신을 다시 만나주기나 했을까.
사실 마지막으로 만난 날, 원하지 않는 소선을 억지로 안았던 게 화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잉태된 아기가 지금 소선의 몸에서 자라고 있으니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짓겠다고 팔을 베고 누워 서로 이름을 주억거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소선은 천재적인 예술가니까. 그녀라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고 우룡은 생각했다.
우룡은 몸을 일으켰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초저녁의 선잠 때문인지 더 이상 잠이 들지 않았다.
창으로 거센 빗소리가 차고 들어왔다. 아무래도 날이 밝기 전에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소선은 거실 소파에 기대 잠이 들어 있었다. 방금까지 그림 작업을 한 듯 에이프런을 입은 채였다. 우룡은 담요를 가져가 소선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비는 살짝 그치고 있었다.
건물 바로 옆에 소선의 차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만삭의 소선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혼자서 운전해 갈 걸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소선은 이제 프랑스로 떠날 것이다. 자신도 다시는 이 별장에 발을 들일 일이 없을 것이다. 천천히 문을 나서며 우룡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울컥 둔덕을 넘으며 조수석에 놓여 있던 카세트테이프 가방이 아래로 곤두박질을 쳤다.
잠시 차를 멈추고 쏟아져 나온 테이프를 주워 올리다 문득 아무거나 집어 카 오디오에 밀어 넣고 운전을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옥상에선 아무 녹음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룡은 그간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걸 깨닫고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이 테이프 저 테이프를 넣어보며 도로로 진입했다. 테이프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마 한참을 더 가서 오디오에 테이프가 들어 있다는 걸 깜박 잊었을 즈음일 것이었다.
“우룡아… 형 한 번만, 한 번만 봐 주라. 네 눈앞에서 싹 없어질 게. 응?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봐 주라, 우룡아 제발.”
우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쇠뭉치 하나가 머리를 쳤다. 소선이 들었구나, 이걸.
우룡은 좌측 깜박이를 켜고 힘주어 운전대를 꺾었다. 돌아가야 했다. 하는 수 없었다.
[글: 이경희 / 그림: 도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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