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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유섭(1905–44) 선생의 업...'))
우리나라 최초의 미학자 우현(又玄) 고유섭(1905~1944)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제16회 우현상 시상식이 22일 인천문화재단에서 거행되었다.
우현 고유섭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고분·건축·불상·도자·회화 등 한국미술사 전반을 깊이 연구하여, 한국미학과 한국미술사 연구의 초석을 놓은 선각자다. 약관의 나이에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하여 타계할 때까지 방대한 미학 미술사 연구를 한 학자다.
특히 우리 미의 특징을 ‘무기교의 기교’로 정의했던 그의 업적은 우리 문화가 전 세계인들에게 주목받는 시점에서 더욱 빛이 난다. 학술상은 ‘민화의 시대’ 저자 윤진영, 예술상은 서양화가 정용일이 각각 받았다. 우리 주체성에 입각한 예술 연구와 창작 분야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시상이야 어디서든 할 수 있지만, 우현 고유섭의 비중과 명성을 감안한다면, 정부 차원에서 주관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고유섭이 인천 출신이기는하나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을 대표하기에 그렇다.
예술상 수상자 정용일을 살펴보겠다.
정용일(66)은 우리의 주체적인 미술, 정체성 있는 미술 창작에 헌신해 온 화가다. 80년대 우리 미술이 모더니즘 대 민중미술의 이데올로기적 대결 구도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중심에 둔 현대미술의 입장에 선 작가다.
모든 게 서구적 기준과 잣대로 행해지는 현대미술을 뒤로 하고우리가 중심이 되는 미술을 역설했다. 물론 미적 자율성이라는 모토가 다른 쪽에서는 비판받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정체성 확립이 더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80년대 말 작가는 우리 고대의 고분벽화·무속·신화 등을 화면에 등장시켰다. 특히 돼지머리나 샤먼이 등장하는 무속의 표현이 많다. 통일과 같이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민화적인 분위기로 표현했다. 특히 90년대 초 ‘무(巫)와 현대인’ 연작에서는 현대인들의 희노애락과 깊은 연관을 지닌 무속의 모습을 더욱 설명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이러한 무속적인 면들은 갈수록 절제되고 내면화되거나 더 은유적인 방식으로 전환되어 간다. 작가가 무속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속이 토속종교라는 동기도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보다 중시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영과 육체, 성(聖)과 속(俗) 등의 대립적 세계들의 매개를 바로 무속이 강렬하게 표방하고 있는 점이다.
작가는 재현, 즉 묘사에 관한 한 누구와 겨뤄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 묘사력 때문에 평생 고민한다. 작가는 세계 혹은 대상의 외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질이 중요하다는 점, 그것을 경험한 내용들을 어떻게 화면에 옮기느냐의 문제에 역점을 두었다.
그렇다 보니 묘사력이 자주 직관적 경험의 내용들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본의 아니게 작가는 자신의 묘사력에 강박관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말이다.
그 결과 묘사력의 억제와, 그럼에도 최소한의 이미지 재현이 필요한 상황에서 절충점에 고심하여 점묘와 표현주의적인 거친 필치 같은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 다시 자연의 문제로 회귀한다. 작가는 자연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는 것 같다. 무속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범(凡)자연이다. 숲, 특히 소나무 숲을 많이 그렸다. 자신이 그토록 묘사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재현을 소환도 하고, 또한 예의 절충적 점묘를 필요에 따라 도입도 한다.
여기서 작가는 나무를 생태적 관점 혹은 정서적 차원에서만 다루는 데 머물지 않고, 더 초월적인 존재와의 접합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보편적 자연에 대한 겸허하고 진지한 경험과 성찰로부터 다소 신비적이고 몽환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난해 서소문성지박물관에서 가진 초대전은 기념비적인 대작들을 선보인 매머드 전시였다. ‘삶의 경계-생(生)’으로서 인간의 삶을 성찰한 대서사시와 같은 작업들로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투스 등으로 교차되는 삶의 본질을 고뇌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표현주의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양식에 담은 서사적 회화로서 작가의 회화적 진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발표한 작업들은 또 전혀 다른 분위기의 그림들이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강렬한 원색으로 화폭을 뒤덮었는데 예상 밖으로 대조적인 흑백의 거대한 목탄 드로잉 작업을 들고 나왔다.
‘낯선 숲에서’ 연작들로, 표현의 세계나 양식이 워낙 광폭으로 전개된 터라 거침없이 자신의 서사를 종횡무진으로 펼쳐가는 모습에서 이제 진정한 자유인의 면모가 느껴진다.
시들어 버린 검불이나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나타내는 목탄의 유현하고 거친 선들이 전에 없이 비장하고 강렬하다. 어쩌면 작년의 ‘삶의 경계’ 연작들과는 대조적으로 단색 선묘들이 죽음의 서사를 담아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작가에게 세계는 생성과 소멸, 살아 있음과 죽음이 서로 순환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조가 풍부한 작년의 작품들과 올해의 목탄 흑백화면은 대조적이지만, 좀 더 넓은 지평에서 볼 때 양자는 서로 순환하면서 시너지를 유발할 수 있는 관계다.
2010년대 중반 ‘광야’ 연작에서 보듯 무언가 몸부림 같은 작가의 그림이 밝아도 밝은 것이 아니며, 2022년 근작들 역시 같은 몸부림이지만 어두워도 어두운 것이 아니다. 팔리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작가의 기개에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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