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존재가 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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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View]- 요안 부르주아의 중력 거스르기

추락하는 존재가 할 수 있는 것

박선옥 논설실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2-12-02 00:02:40

추락. 일단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단어다. 이 과정이 전개되기 직전의 위급하고 불안한 상황이 짐작되면서 이어지는 결과가 비극적일 가능성이 예상된다. 인간의 작은 몸뚱이에 비해 어마어마한 크기와 무게를 가진 지구가 중력의 힘으로 사정없이 인간의 몸을 바닥으로 끌어당겨 내동댕이치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계단을 오르고 있다. 중간쯤 올라가던 그는 몸이 기울어지더니 그만 난간도 없는 계단 아래로 추락한다. 지켜보는 이들은 그 순간 철렁했을 것이다. 다행히 바닥에는 탄성 좋은 트램펄린이 놓여 있어 그의 몸에 가해지는 중력의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한다. 그뿐 아니라 트램펄린의 탄력에 의해 그의 몸은 그가 떨어졌던 계단 위로 튕겨 올라간다. 거기서 계단 두 세 개를 더 오르던 그는 또 몸의 중심을 잃은 듯 아래로 떨어지고 트램펄린의 도움으로 다시 계단에 올라선다. 그가 아홉 개로 이뤄진 계단을 오르기 위해 추락한 횟수는 32회. 마지막 33번째 도전에 이르러서야 그는 마침내 정상에 도달한다.

‘중력을 갖고 노는 안무가’라고 불리는 요안 부르주아의 이 공연은 ‘성공은 일직선이 아니다(Success Isn't Linear)’라는 제목으로 소셜미디어(SNS)에 공유되면서 세계적으로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주말 국내에서도 요안 부르주아의 공연이 있었는데 일찌감치 입장권이 전석 매진되는 바람에 나는 아쉽게도 직접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부르주아는 서커스와 무용의 경계를 허무는 행위예술가이자 안무가로 알려져 있다. 1981년 프랑스에서 출생한 그는 국립서커스예술센터를 다니는 동안 국립현대무용센터에서 현대무용도 함께 공부했다. 2010년에는 ‘요안 부르주와 컴퍼니’를 만들어 서커스의 매커니즘과 현대무용의 미학을 결합하는 창작 활동을 해 왔다.

부르주아의 작품에는 자연의 힘과 인간의 몸이 소재로 등장한다. 앞에서 소개한 장면도 이 지구상에 만연한 힘, 중력과 그 중력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의지를 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공연 영상에 한 네티즌이 올린 댓글 하나가 상상력을 자극했다. “새벽에 이 영상을 보고 있는데 왠지 눈물이 난다”는 내용이다. 남들이 아직 자고 있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부지런히 가방을 챙겨 학원으로 향하는 재수생 혹은 삼수생일까. 아니면 거듭된 사업 실패를 딛고 저기 계단 맨 꼭대기를 향해 또 다시 도전하는 어느 가장이 자신의 모습을 본 걸까.

부르주아는 인간 존재의 벗어날 수 없는 조건으로서의 중력에 관심을 갖는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중력을 두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첫 번째 비극”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말을 바꾸면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추락할 운명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부르주아의 무대에서는 무용수들이 이 운명을 거스르는 퍼포먼스가 전개된다.

그의 작품에는 무대장치가 매우 단출하다. ‘성공은 일직선이 아니다’라는 작품엔 아홉 개의 계단과 트램펄린, 그리고 무용수 한 명이 등장한다. 또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기울어진 사람들’에는 한 변이 4m 정도로 보이는 정사각형 형태의 판자가 무대 장치의 전부다. 이 네모난 나무판자가 턴테이블처럼 회전하면서 기울어지기도 하는데 그 위에 서 있는 여섯 명의 무용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기울이며 동시에 회전을 거스르는 발걸음을 쉬지 않는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회전판의 속도가 높아질수록 무용수들의 몸이 중심을 향해 거의 45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사람의 몸이 45도 앞으로 기울어질 때 중력의 작용으로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맨땅에 헤딩을 하게 된다. 그런데 부르주아는 회전에서 발생하는 원심력을 이용해 중력에 대항한다. 트램펄린의 탄성을 이용하듯 회전판의 원심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몸이 회전방향을 따라 밖으로 튕겨나가는 대신 그 힘이 중력과 균형을 이루도록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이는 우리가 거센 바람을 마주하고 나아갈 때 뒤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이는 원리와 같다.

부르주아에게 ‘중력을 가지고 노는 안무가’란 칭호가 붙은 것은 그가 연출하거나 출연한 거의 모든 공연들이 이처럼 중력을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퍼포먼스를 두고 중력에 ‘저항한다’고 하지 않고 ‘가지고 논다’고 표현하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만일 중력에 저항하는 몸짓을 표현하려 했다면 계단 위에서 ‘추락’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모습이 연출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퍼포먼스에선 아무런 저항 없이 추락한 후에 트램펄린이 가진 탄성의 힘을 이용한 도약을 놀이처럼 즐기는 모습이 전개된다. 이 모습을 통해 부르주아는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듯하다.

‘인간은 자연의 힘의 지배를 받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자연의 또 다른 힘을 이용해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추락을 두려워하는 대신 추락을 받아들이자. 그것도 더 깊은 추락으로. 더 깊이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떨어졌던 곳보다 더 높은 지점으로 도약할 수 있다.’

부르주아의 공연이 왠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런 메시지가 와 닿은 때문이 아닐까. 대학 삼수생이든, 폐업한 자영업자든, 지지율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대통령이든, 우주의 규칙을 가지고 노는 부르주아의 배짱을 벤치마킹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박선옥 논설실장 sobahk@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