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2]핏빛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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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제국의 꽃’ [2]핏빛꽃

내 사랑은 겨울꽃으로 내게 올까, 봄꽃으로 나를 찾을까?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1-05 09:44:30

내 사랑이 떠나갔다. 믿을 수 없다. 간밤에 우리는 평소처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이 하도 아름다워서 순간 나는 그녀에게 입 맞출 뻔하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눈은 깊고 향기로웠다. 한동안 그녀를 외면한 것은 빨려 들어가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눈동자 때문이었으리라. 향원지처럼 그윽하고 수련처럼 향기를 품은 눈동자가 어쩐지 두려웠다.

이렇게 금방 그녀와 헤어질 줄 알았다면, 그랬더라면, 난 더 많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더 많이 그녀를 안았어야 했다. 그래, 그랬다고 치자. 이제 나는 지어미를 지키지 못한 사내가 되어 꼴좋게 동그라져 있지 않은가! 나는 무도한 왜놈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놈들의 칼날을 막고 그녀를 안아 지켜주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떠난 세상으로 함께 갔었어야 했다.

어찌 나만 숨 쉬고 있는가! 함께 거닐던 녹원에서 그녀가 불태워졌다. 달려 나가 그녀의 그슬린 머리칼 한 올이라도 찾아 품에 안고 통곡하고 싶지만 내겐 그럴 자유도 없다. 그녀는 궁궐 안 사방에 가득하다. 옥호루 뜰에, 향원지 물안에, 녹원의 풀과 나무속에, 아니, 이 궐에 채 가시지 않은 연기 속에, 공기 속에 그녀가 살아 있다. 곧 녹원은 단풍으로 물들겠지. 단풍이 지쳐 낙엽이 되면 땅에 떨어져 그녀의 파편들을 만날 것이다. 내가 단풍이고 낙엽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녀는 죽으면 꽃으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했다. 궁궐 안을 온통 자신의 향기로 물들이겠다고 했었다.내 사랑은 겨울꽃으로 내게 올까, 봄꽃으로 나를 찾을까? 매사에 부지런한 그녀는 약속을 지키려고 벌써 피어났을지 모른다. 작년 갑오년 여름에도 왜놈들의 침입이 있었다. 조상께서 지어놓으신 이 궐에 화약과 총을 들고 난입했었다. 동학당들의 난을 핑계 삼아 인천에 무단으로 상륙한 놈들은 곧바로 서울로 침입했고 궁궐 주변을 시끄럽게 행군했었지.

도성 안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지. 임진년 왜란을 상기한 나의 백성들은 우마차에 살림을 싣고 피란을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도처럼 들어온 놈들은 급기야 나의 거처인 궐로 향했다. 7월 23일 자정에 놈들은 영추문을 부수고 들어왔지. 강도가 따로 있나? 신식총으로 무장한 놈들은 왕궁수비군과 치열한 접전을 하고선 7시쯤에 우리 부부를 찾아내어 위협을 가했다. 궐에 있는 놈들의 스파이가 내가 있는 곳을 알려준 게다. 조금 지나선 웬일인지 아버님께서 궐에 도착하셨지. 놈들은 나의 명령을 강제로 취해서 우리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병기를 강탈했다. 한 달간 궁을 점령한 놈들은 무수한 나라의 보물을 실어 날랐다.

나는 그 때 죽었어야 했다. 놈들의 겁박으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놈들에 붙어먹는 신하들을 궁으로 불러들이기 전에, 강도들이 나라의 보물을 실어가기 전에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녀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와 나에겐 지켜야 할 백성이 있었다. 그 여름, 강도가 난입해 칼과 창으로 우리를 협박할 때 그녀의 눈동자가 내게 말했다.

“내 사랑, 아니에요. 지금은 안 됩니다. 당신은 살아 남으셔야 해요. 우리는 강도를 쫓아내야만 해요. 반드시! 여기서 무너지시면 아니 됩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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