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4]지난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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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마마를 지켜드릴 수 없었어요.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1-09 11:15:27

릴리아스 선생은 세자빈을 치료하고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왕비전의 어린 나인 명준이었다. 이제 아홉 살 이지만 야무지고 똑똑해서 왕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이였다.

“준! 여기 웬일이야? 심부름 온 거니?”

릴리아스가 물었다. 명준은 대답대신 눈물을 흘렸다.

“저, 선생님! 선생님한테 가 있으면 안 될까요? 저는 궐이 너무 무서워요. 선생님, 저 좀 데리고 나가주세요!”

명준은 애절했다.

“마마는 어찌하고 여기 와 있는 거야? 마마가 아시면 큰일이다, 준!”

로제타 선생이 대답했다.

“마마는, 마마는 지금 안 계셔요. 로제타 선생님, 부탁이에요. 저 좀 데리고 나가 주세요. 너무 무서워서 전 궁에 있을 수 없어요.”

명준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이야기해봐.”

릴리아스가 명준을 달래며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마가 펄펄 끓었다.

“로제타, 이 아이를 봐요. 이마가 아주 뜨거워요. 여기 그냥 둘 수 없겠어요. 우리가 언제 다시 궁에 올진 모르고,... 명준을 돌보아 주어야겠어요.”

그들은 뜨거운 열에 시달리며 무서움에 떨고 있는 명준을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사가에 들르는 나인이라고 대충 둘러대곤 로제타 선생의 집으로 향했다. 해열제를 먹고 한 숨 잔 명준은 저녁 나절엔 이야기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선생님, 우리 마마가 돌아가셨어요.”

명준이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전 마마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어요. 전 무섭고 죽고 싶어요.” “준! 그게 무슨 말이니? 오, 하나님! 광화문이며 전각이며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만 마마가 돌아가셨다고?”

릴리아스 선생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명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지난 밤, 왕비께서 장안당을 나서 침전으로 돌아오시는 것을 확인한 나인과 상궁들은 각자의 처소에서 잠을 청했다. 이른 새벽, 시끄러운 총소리에 풋잠을 깨었다. 명준은 상궁의 명으로 밖으로 나가 동태를 살폈다. 전하와 세자저하가 깨어나 내관을 불러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하셨는데 대신 정병하는 별 일 없다고 전하를 안심시켰다. 잠시 후 일본군과 칼을 든 자객들이 전하의 침소로 난입했으며 왕비마마를 내어 놓으라며 전하를 협박했다. 세자저하에게는 칼등으로 내리쳤으며 세자빈마마의 머리채를 쥐고 배를 걷어찼다.

그들은 왕비마마의 거처로 쳐들어왔는데 마마의 얼굴을 알 수가 없어 상궁과 나인을 닥치는 대로 칼로 베었고, 또 옥호루 안의 나인들에게 왕비마마가 누구인지 대라고 하고 아무 대답도 안하니 하나씩 2층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왕비마마를 끝까지 지키려던 이경직대감은 양팔이 잘리고 총과 칼에 맞아 목숨이 끊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마마는, 마마는 어찌 되셨느냐?”

릴리아스가 울먹이며 물었다. 명준의 숨이 한순간 멎는 듯 했다.

“마마는 놈들의 손에 잡혀 여러 번 칼에 베어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저는,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마마를 지켜드릴 수 없었어요.”

명준은 작은 몸을 큰 독 속에 숨기고 떨면서 이 모든 광경을 보았다. 로제타 선생은 말없이 어린 나인을 꼭 끌어안았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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