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5]아이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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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민의 청량한 음성에 로제타는 옛 생각에 잠겼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1-10 09:20:51

‘그래, 그 때도 가을이었다. 평양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 산길을 가다가 나는 이렇게 한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지.’

로제타선생은 그때가 생각났다. 울고 있던 작은 계집아이! 그 아이를 안겨준 여인이 떠올랐다. 얼굴 하얀 서양인이 아이를 잡아 간이고 폐고 꺼내 먹는다는 소문도 못 들었는지, 갑자기 숲에서 나타난 그 여인은 다짜고짜 내 품에 이 아이를 안겼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려하자 여인은 몸을 돌려 쏜살같이 달아났다. 얼마나 빠른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사연일까? 그리고 왜 하필 조선인도 아니고 양코배기 여자인 내게 아이를 맡겼을까?’

서너 살 쯤 되는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울며 따라갔다. 하지만 아이의 걸음으로 제 엄마를 따라 잡을 수 없어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엄마를 포기할 수 없는 아이는 다시 일어났지만 더 이상 뛸 수 없었다.

남편과 서울로 가는 배를 타러 부두로 가는 길이었다. 남편은 아이를 업고 나는 아들 셔우드를 안았다. 우리 일행은 서울로 향했다. 배 안에서도 목 놓아 엄마를 부르며 울던 아이는 지쳐 잠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이 아이를 잘 기르겠다고 기도를 올렸다. 집으로 돌아 온 아이는 천천히 엄마를 잊고 우리 가족이 되어 지내고 있다. 그게 벌써 5년은 되었다.

“맘, 명준은 좀 어때요?”

문을 홱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보민의 청량한 음성에 로제타는 옛 생각에서 흠칫 깨어났다.

“명준, 열이 좀 내렸어?”

보민은 작은 손을 뻗어 명준의 이마에 가져갔다.

“오, 지금도 끓고 있네. 아궁이네? 고구마 하나 구워 먹어도 되겠는 걸.”

보민의 농담에 명준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보민, 준은 많이 좋아졌어. 준이랑 좀 놀아줄래?”

로제타 선생은 아이들을 남겨두고 릴리아스 선생과 거실로 나왔다. 둘은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거칠고 점잖지 못하고 무력을 앞세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난 새벽에 궁에서 일어난 일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전쟁도 아닌 평화로운 때에 총과 칼을 들고 궁으로 들어가 왕을 협박하고 왕비를 죽이다니!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던 왕비의 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려요.”

한참의 침묵 후에 릴리아스 선생이 속삭였다.

“검소하고 총명하고 위엄있는 분이셨는데! 그분은 외국인과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도 없으셨죠.”

로제타 선생이 대답했다.

“십자가의 의미도 물어 보셨지요.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는 조선이 섬기는 하느님 이야기도 해 주셨어요.”

“왕께서는 얼마나 힘드실까요. 세자와 세자빈이 그렇게 된 것도 이제 이해가 되네요.”

“아까는 그분들이 아무 말 안 해서 위로하지도 못했어요. 아마 당분간 소문내지 말라는 명이 있었을 겁니다.”

“불쌍한 왕비마마의 영혼을 위해 기도드립시다. 우리!”

그날 아침, 궁궐 안에서는 참변을 당한 고종이 러시아공사 베베르, 미국대리공사 알렌과 마주 앉아 있었다.

“전하,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베베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도 고종과 왕비를 지켜드린다고 했으나 졸지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 분하기도 하고 믿기지도 않았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